문화적 역량 보여주는데 소홀
외국작품 전시회 등 최근 큰 성황
국민의식 걸맞은 미술관 건립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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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화 중앙대교수·문학평론가 |
서양, 특히 우리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의 도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거의 모든 도시가 커다란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돼 그 광장에는 큰 성당과 함께 왕궁이나 시청 같은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몇 번 다니다 보면 그 비슷한 양식에 자칫 식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도시에 무엇인가 매력적인 문화가 더해진다면 그때는 도시의 표정 자체가 달라진다.
그 문화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미술관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미술관만 있다면 아주 외진 도시의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티스가 내부 장식을 책임진 셍 폴 드 방스의 성당이며, 화가의 작업실과 함께 삶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지중해의 여러 항구들,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이 있는 알비 등을 찾아가는 일은 기쁨과 설렘 그 자체였다. 도착해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문득 지도 위의 낯선 곳이 갑자기 정겨운 영혼의 고향으로 바뀌곤 했다. 나는 그것을 영혼의 연금술이라 부른다.
10여 년 전 귀국을 했을 때 이 땅은 어지러웠다. IMF 구제금융 신청과 함께 온 나라가 가난에 대한 공포에 빠져 있었다. 뼈아픈 경험이었고 30대 초반의 가장인 나 역시 꽤 고생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그때에야 비로소 이 땅이 지구의 다른 곳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머리가 아닌 눈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꼭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이 땅의 풍경은 바뀌었다. 외국자본과 외국인, 외국의 생활양식이 우리 삶의 곳곳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제 우리는 그 풍경을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게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세계시민으로서의 성숙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데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일의 소홀함이다. 외국에서 지낸 인연으로 나는 이따금 외국인 손님을 맞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권할 만한 미술관 하나 변변하게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접근성이 몹시 나쁘며 그 밖의 미술관은 규모가 작거나 국내용일 뿐이다. 경제규모 세계 13위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우리 미술의 역동성을 보여줄 미술관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세계 35위권에 그치고 있다. 경제부문의 활력을 고려하면 문화적 후진성은 더 아래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외국의 귀한 작품들 들여와 연 전시회는 예외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 국민 특유의 열성이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그 문화적 관심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마침 사간동 옛 기무사 터에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미술인의 여망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들어설 그 미술관은 그러나 미술인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부심에 걸맞고, 대한민국과 수도 서울의 품격을 높여줄 미술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연금술을 위해 외국인 스스로 찾아올 수 있을 그런 미술관을 보고 싶다.
박철화 중앙대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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