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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13> 의성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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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8-02 17:41:27 수정 : 2011-08-02 17: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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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아들 김석이 시조…독립유공자 85명 배출한 명문가
#의성김씨는

경북 의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석은 고려 초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이 의성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김씨의 시조 김석에 대해서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의성김씨 족보)이라는 설과 다섯째 아들(조선씨족통보, 신라김씨분파연원보)이라는 설로 나뉘어 있다. 시조 김석에 의해 처음으로 개관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 대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는 태자첨사(太子瞻事)를,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의성김씨는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파·수사공파·충의공파·찬성공파·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이다. 의성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성김씨의 중시조인 김용비의 묘와 오토제 전경.
#의성김씨 연혁과 인물

의성김씨는 김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 나왔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 13명이나 된다.

고려조에서는 김공우 아들 3형제 외에도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김훤(金暄)과 우왕 때 도순문사를 지낸 김광부(金光富)가 유명했고, 삼국사기 발문을 쓴 김거두(金居斗)가 있다. 그리고 추밀원부사를 지낸 김춘(金椿), 좌사부대부를 지낸 김옥(金玉), 평장사를 지낸 김연(金衍) 등이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성김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한 김안국(金安國)과 정국(正國) 형제를 들 수 있다. 김안국·정국 형제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천문·주역 등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같은 시대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와 쌍벽을 이루었다.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을 주창했다면, 김안국은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기도 했다. 그는 학문의 입문서로 알려진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이기도 하면서 ‘모재집’ 등을 집필했고, ‘이륜행실’ 등의 편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의 동생인 김정국은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남겼다.

의성김씨 학봉고택
그 외에 임진왜란 전에 조선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있다. 동인이었던 그는 일본에 다녀온 후 서인 황윤길이 일본의 조선침략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에 반대하여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핵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변호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招諭使: 난리 시 백성을 초유하는 임시벼슬)로 의병을 모아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학문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학봉고택은 의성김씨 종가로 유명한데, 그중 운장각은 학봉의 유품과 의성김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옛 책과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의성김씨는 조선 말기에 들어와 많은 의병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안동김씨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는 안동김씨의 권세가 막강하였는데(조선 전·중기는 선 안동김씨가, 후기는 후 안동김씨의 세도가 심했다), 조선 말과 일제 때에는 의성김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심지어 같은 가문, 집성촌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 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서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전봉준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金道三),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유명하다.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려 투옥되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하여 육영사업을 진행했으며, 3·1운동 이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신문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폭파하도록 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도 그의 지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복역하는 중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때 받은 고초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설립한 성균관대학의 재단 분규로 총장직을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일송 김동삼의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결성을 논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교포의 안정과 교육 문제에 힘쓰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시 상하이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가 되었는데,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1931년) 때 하얼빈에서 잡혀 강제 송환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는 중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의성김씨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김중위·김명윤·김원웅·김화남 등이 있으며, 수많은 정관계·학계·재계 인사들이 있다. 

학봉고택에서 치러지는 의성김씨 기제사.
#또 다른 의성김씨-분관 성씨들

의성김씨 후손들은 여러 파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성씨가 본관을 분적해 나가기도 했다. 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김씨(開城金氏): 개성김씨는 김석의 8세손 김공우의 셋째 아들 김용주를 시조로 삼고 있는 성관이다. 개성으로 성관을 삼은 것은 시조 김용주가 여진정벌에 공을 세우고 추충공신(推忠公臣)으로 책록되고, 개성부사·평장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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