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열혈 청년 장교에서 42년간 무소불위 권력을 누리던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종말을 맞았다.
1942년 리비아 수르트에서 태어난 카다피는 27세의 육군 대위였던 1969년 벵가지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벵가지는 지난 2월 반독재 시위가 시작된 곳으로 반카다피 세력의 중심지가 됐다. 카다피 정권의 창출과 붕괴 모두 벵가지에서 시작된 셈이다. 카다피는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했으며, 국내에서는 반대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1986년 독일 베를린에서 미군 전용 나이트클럽에 폭탄테러를 했고, 1988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 팬암 여객기를 폭파해 270명을 희생시켰다. 카다피는 영국의 골칫거리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을 비롯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 곳곳에서 반정부 무장단체를 지원했다.
카다피는 1993년 리비아 최대 부족인 와르팔라족 출신 군인 2000명이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자 전투기로 진압했고, 1996년 벵가지의 아부슬림 감옥에서 정치범 1200명을 학살했다.
카다피 일가의 부패는 여느 독재정권과 다르지 않았다. 카다피가 해외에 숨겨 놓은 자산은 스위스 4억 달러 등 최대 15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하면서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으던 카다피는 시민군에 패배한 후 도망자 신세가 됐다. 트리폴리 함락 직전까지도 지지자들에게 정권을 사수하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시민군이 그의 관저인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를 장악하고 보니 이미 탈출한 상태였다. 이후에는 시리아의 방송사 등을 통해 항전 촉구 메시지를 보냈지만 무너지는 정권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 권좌를 유지했던 사람은 김일성(46년)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49년)뿐이다.
카다피가 정권을 세웠다가 몰락하는 과정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연상시킨다. 각각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1969년 쿠데타를 일으킨 것. 서방과 대립각을 세우며 지지를 얻었지만 철권통치와 축재를 일삼다가 정권이 무너진 뒤 도피 중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그렇다.
카다피의 기이한 언행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9년 카타르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의에서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 왕’이라고 칭해 빈축을 샀다. 2009년 유엔총회에서도 기행은 이어졌다. 총회 단상에서 연설을 하던 그는 할당시간인 15분을 무시하고 90분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서방에 대한 비난을 쏟아 놓았고 유엔헌장을 찢기도 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에 대해 ‘중동의 미친 개’라고 표현했다.
카다피는 스스로 진급을 대령에서 중단시켰다. “리비아 군은 국민의 지휘만 받는다”는 명분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외신은 아직까지도 ‘카다피 대령’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카다피가 한국과 관련된 뉴스에는 부정적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리비아 대수로 공사인데 카다피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었으면 이처럼 큰 규모의 토목공사가 실행에 옮겨지기 힘들었고, 따라서 한국의 중동 건설붐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사업도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안두원 기자 flyhig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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