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판매권 얻으면 6∼7배 이윤 보장
상인간 경쟁 치열… 관료에 뇌물 만연
대운하 통행땐 황실·관리가 우선권 양저우(揚州)는 2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이며,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으로 강남의 풍정을 자아내는 도시다. 그렇지만 과거의 화려한 번영에도 눈에 보이는 풍경에만 감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양저우는 아담한 서우시후(瘦西湖)와 몇 개의 볼 만한 정원을 가진, 그저 그런 도시에 불과하다. 일반 사람들에게 양저우는 아름답기로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 미치지 못하고,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난징(南京)에 미치지 못하며, 상업적인 번성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미치지 못한다. 이웃해 있는 도시들과 비교할 때 현재의 양저우가 지닌 이러한 상대적 빈곤함 때문에 양저우를 찾는 관광객은 많은 편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보기에 양저우가 자랑하는 호수와 정원들은 쑤저우의 정원이나 항저우의 호수만큼 매력적이지 않고, 양저우에 있는 역사 유적들은 난징의 유적에 비해 빈곤하며, 양저우의 거리는 상하이의 거리에 비해 쓸쓸하고 초라하다.
양저우시 서쪽 교외에 있는 호수 서우시후(瘦西湖).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보다 좁다 하여 서우시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양저우(揚州)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도시로 고대 중국 강남(江南) 물자를 운송하는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다. |
청나라 때 양저우에 살았던 후이저우(徽州) 출신 소금상인들이 직면했던 수많은 시련과 그럼에도 이들이 서로 돕고 단결하며 지켜나간 상도(商道)를 그린 ‘대청휘상’이란 드라마에서 필자의 머리에 오랫동안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은 상인과 관리의 관계였다. 하찮은 하급관리까지 상인 알기를 우습게 아는 풍토와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뇌물은 구조적·보편적 현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드라마는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기록은 소금매매에 대한 관리의 개입이 너무 심해서 소금장사에 뛰어든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망할 정도였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런 기록은 장사하기보다 장사에 개입하는 관리들 다루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황산(黃山) 아래에 있는 시티(西梯) 마을에서 볼 수 있듯 소금장사를 통해 돈을 번 후이저우 상인들이 고향에 남아 있던 자식들을 한사코 공부시키려 했던 것도 이들이 관리로부터 겪은 온갖 수모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저우시 서북쪽 교외인 레이탕(雷塘)에 있는 수양제(隋煬帝)릉. |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6년 동안에 걸친 공사기간 동안 수백만의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혹사했다. 공사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의 숫자가 수십만에 달하는 참혹한 노역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운하를 완성하자마자 엄청난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여 수도인 뤄양(洛陽)에서 양저우(당시 명칭은 장두·江都)에 이르는 사치스러운 여행, 방탕하기 짝이 없는 남순을 시작했다. 궁궐 규모의 거대한 용선을 건조하여 대운하에 띄우고, 이 용선을 1000여명의 사람이 2개월 동안 운하 양쪽에서 끌고 가는 가운데 수양제는 배 위에서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에서 선발한 수백 명의 미녀와 매일같이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수양제의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를 두고 백거이는 “배에서 들리는 노래와 웃음소리는 언제 그칠 것인가”라고 썼던 것이다.
중국 4대 고전 양식 정원의 하나인 거위안. 거위안이라는 정원 이름은 대나무를 몹시 좋아하는 정원 주인이 대나무 잎사귀와 비슷한 한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
필자가 양저우의 서우시후를 유람하는 배 위에 앉아 세 번째로 떠올린 것은 과거의 대운하 풍경이었다. 현재는 호수로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대운하와 연결된 수로였던 서우시후를 둘러보며 이 호수가 자랑하는 꽃과 버드나무와 누각에 관심을 쏟기보다 청나라 때까지도 운하를 가득 메우며 남북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바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서우시후를 유람하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중국사람들의 목소리마저 필자는 대운하 위에서 서로 빨리 가려고 싸우고 있는 선원들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었다.
청나라 양저우 거상 허씨 가문이 만든 개인 정원인 허위안. |
필자는 이 같은 상념들에 잠기며 무거워진 마음으로 양저우에서 술을 마셨다. 맛이 담백하고 화려한 색깔을 가진 양저우요리, 해산물을 많이 이용하고 간장과 설탕을 많이 넣어서 달고 진한 맛이 나는 양저우 요리를 시킨 후 술을 마시면서 번성하던 시절의 양저우가 지닌 퇴폐적 분위기에 젖어드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맨 정신으로 양저우에 앉아 있기에는 왠지 거북해서였다. 피곤한 상상을 멈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이미지 속으로 빨려들어갈수록 과거의 부정적인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우리 모습과 중국의 모습이 술맛을 돋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문학대가의 명성을 떨쳤던 신라 최치원을 기념하기 위해 양저우 탕성(唐城)에 세워진 최치원기념관.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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