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 생기면 “고지했다” 발뺌 지난해 딸 영은(가명·29)씨가 갑자기 왼쪽 엉덩이에 심한 통증을 호소해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 데려갔던 강미화(가명·54)씨는 “딸의 병이 ‘점액낭염’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병인지 물어봐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며 “주사를 맞은 후 고열에 시달리며 너무 아파해 왜 그런지 물어봐도 설명해주지 않아 결국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병원 문턱은 낮아졌지만 환자들에게 의사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다. 늘 바쁘고 피곤해 보이는 의사 앞에서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제대로 말할 수 없고, 궁금해도 물어보지 못한다고 환자들은 토로한다. 의사가 어려운 의학용어로 짧고 간단하게만 설명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의사와 환자의 이런 ‘불통(不通)’이 불의의 사고나 의료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9일 법원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중재원), 한국소비자원 등에 따르면 최근 접수되는 각종 의료분쟁 사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의사의 설명의무’다. 진료와 치료 과정에서 의사에게 치료방법이나 부작용, 예후 등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해 피해를 봤다며 환자들이 소송 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의료전문 변호사들과 중재원 조정위원들은 “의료분쟁은 대부분 원인이 복합적이지만 60∼70%가 설명의무에 관련된 것으로, 의사가 설명만 잘해도 분쟁이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무성의한 설명, 돌이킬 수 없는 상처
의료분쟁이 잦아지면서 최근 수술이나 시술, 검사에 앞서 동의서를 받는 병원들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일부 병원에서는 동의서 내용을 꼼꼼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환자에게 사인만 받아 분쟁 발생 시 책임회피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윤선화(가명·37)씨는 지난 1월 A대학병원에서 “자궁 내에 2∼5㎝의 혹 3개가 있으니 제거하는 수술을 하자”는 의사 권유를 받고 수술동의서에 사인했다. 그 후 두 달간 생리가 없어 산부인과를 찾아간 윤씨는 “자궁이 없어 생리를 안 하는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대학병원에 항의하자 의사는 “환자가 사인한 동의서에 ‘전자궁 절제술’이라고 써 있고, 수술 전에 고지했는데 환자가 알아듣지 못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의사 말대로 수술 전 동의서와 차트에는 전자궁 절제술이라고 써 있지만 윤씨는 그 수술이 자궁적출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출산을 할 수 없다는 뜻인지 꿈에도 몰랐다.
의사가 의학 전문용어를 환자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지 않아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한 사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법무법인 해울의 신현호 변호사는 “‘의사의 설명은 환자의 교육정도와 연령, 심신상태 등의 사정에 맞춰 구체적인 정보와 함께 이뤄줘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면서 “의사가 분명히 설명했다고 해도 환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한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9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접수창구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환자들이 진료시간을 예약하고 오지만, 최소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의사를 만날 수 있다. 남정탁 기자 |
설명의무와 관련된 의료분쟁은 주로 성형외과와 치과, 정형외과에 집중된다. 이들 진료과목은 매출경쟁이 치열하고 홍보 마케팅에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병원업계에서는 “셋 다 필수적이기보다는 선택적인 치료가 많은데, 부작용을 다 설명하면 경영이 안 되는 것이 딜레마”라고 한다. 강남의 A성형외과 원장은 “의사가 환자에게 발생 가능한 모든 부작용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지해야 하지만 (실제보다) 축소해서 알려주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의사들은 충분히 설명을 해도 환자들이 귀담아듣지 않거나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한다. B성형외과 의사는 “성형 환자의 경우 혹시 모를 부작용을 설명해도 자신에게 닥칠 일로 생각하지 않고 흘려듣는 경우가 많다”며 “잘 된 사례를 보고 좋아질 것이라고만 기대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치과협회의 한 관계자는 “분쟁이 잦은 사랑니나 어금니 발치의 경우 대부분의 치과의사가 환자에게 거울로 발치할 치아를 보여주고 핀센으로 집어 확인시켜주는 과정을 거치는데, 차트에 이런 과정까지 쓰기는 힘들다”며 “대부분 감정이 상하거나 분쟁이 발생할 때 환자가 차트에 표기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문제 삼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치과와 성형외과의 경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환자들의 기대심리도 높고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수미·이재호 기자 leol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