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사살한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일본 법원의 재판을 받으며 남긴 한탄의 일부다. 지난 1월 거사 장소인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긴 했어도, 순국 직전 안 의사가 느꼈을 분노와 억울함은 여전히 우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한국평화연구학회(이사장 손대오)가 15∼18일 하얼빈에서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외국어대학교와 공동으로 제11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국제협력과 세계평화’를 주제로 한 이번 대회는 제출된 논문 48편 중 10편이 안 의사에 관한 글일 정도로 안 의사를 재조명하려는 열기가 대단했다. 한국·중국·프랑스·포르투갈 등 7개국에서 50여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참가자들의 관심은 무엇보다 안 의사 재판의 부당성에 모아졌다. 거사 당시 하얼빈역은 러시아 영역이었는데도 러시아는 재판관할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안 의사 신병을 일본 측에 넘겼다. 안 의사가 선임한 변호인들은 일본 법원의 제지로 변론을 할 수 없었고, 안 의사의 운명은 일본인 국선변호인에게 맡겨졌다.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 신분이었던 안 의사는 교전 도중 일본군에 체포된 ‘포로’ 대우를 원했으나, 국제사회의 시선과 국내 여론을 의식한 일본은 시종일관 그를 ‘단순 형사범’으로 다뤘다.
일본이 자국민도 아닌 안 의사를 상대로 재판관할권을 행사한 점, 변호인한테 도움을 받을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한 점, 전쟁에 관한 국제법 대신 일본 국내법을 적용한 점 등을 들어 참가자들은 안 의사에 대한 일본의 사형 선고와 집행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박종렬 가천대 교수(신문방송학) 등은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사형을 당한 재야인사들의 판결을 무효화한 전례가 있다”며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안 의사의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안 의사는 순국 직전까지 중국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써내려갔다. 책은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체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경제발전을 이룰 비책을 담고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이 ‘상설 평화회의체’를 만들어 공동은행 설립, 공용화폐 발행, 합동군 양성 등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 대목은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선구적이다.
오영달 충남대 교수(정치학)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독일 철학자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비교한 뒤 “지역의 평화와 협력을 위한 동북아 국가들의 노력이 한층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평화연구학회장인 임채완 전남대 교수(정치학)는 안 의사에 대한 국내 학계의 더 많은 관심을 당부했고, 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대오 선문대 부총장도 “오늘날 한반도가 직면한 긴장의 해소에 ‘동양평화론’이 샘 같은 지혜를 제공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하얼빈 헤이룽장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한국평화연구학회 제11차 국제학술대회 참가자들이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
평화연구학회 회원들은 학술대회와 더불어 헤이룽장성 곳곳의 유적 탐방을 통해 동북아 평화의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 먼저 하얼빈역 부설 안중근기념관을 찾아 헌화와 묵념 등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100여년 전 “내가 원하는 건 이토의 목숨이 아니라 동양평화”라고 외치며 거사를 단행한 안 의사의 넋을 기렸다.
닝안(寧安)에 남아 있는 발해 옛 도읍지 터를 둘러본 회원들은 착잡한 소회를 드러냈다. 한국국제정치학회장인 남궁영 한국외대 교수(정치학)는 “위정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운이 융성할 수도, 꺾일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일행의 발걸음은 김좌진(1889∼1930) 장군이 말년을 보낸 하이린(海林)의 작은 집에도 이르렀다. 김 장군은 1920년대 말기에 독립군의 식량 자급을 목표로 정미소를 운영했다. 이서행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처자식도 버린 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의 생계를 위해 몸소 정미소를 세운 장군의 결단은 애민정신의 극치”라고 설명했다.
하얼빈·닝안·하이린(중국)=글·사진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