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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문화와 종교는 한 뿌리… 스토리 있는 미술관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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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06 21:51:26 수정 : 2017-02-06 21: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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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미술관 짓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씨
명함에 대표나 회장 대신 주인 직함을 고집하는 남자, 인사동 허름한 주점에서

문화인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이기를 즐기는 낭만파, 그러면서도 가톨릭 신부를 연상시키는

로만칼라의 흰 셔츠 정장으로 절제를 삼는 사나이. 100년 가까이 인사동 전통 거리를

지켜오는 통인가게의 주인 김완규씨다. 미술계에선 통인가게 안에 있는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통인오페라’로 이름을 알렸다. 테너 이동환이 단골로 출연하는 무대로,

기업인·주한 대사·문화인들이 주로 객석을 메운다. 귀임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는 테러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후에도 오페라 공연을 찾았을 정도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 나들이도 통인오페라였다.


김완규씨는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인천 강화도에 1, 2층 200평 규모의 10개 미술관(박물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그동안 그가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 청자, 백자 등을 일반에게 보여줄 예정이다. 가장 먼저 고려산 자락에 이름도 별난 ‘박물관 아래 절집’을 추진한다. 2층은 현대미술, 1층은 크리스티에서 구입한 목불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건축가 김동주의 설계로 오는 5월에 착공 예정이다.

“미술관에 와서 불공을 드릴 수 있게 꾸밀 예정입니다. 불당은 첨단 영상 등으로 꾸며 평소엔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겁니다.”

2탄은 ‘미술관 속 예배당’이다. ‘박물관 아래 절집’과 같은 콘셉트다. 스님과 목사도 큐레이터처럼 근무하게 된다.


인천 강화도에 주제가 있는 10개 미술관(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씨. 그는 “문화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미술관은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요.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먹을거리로서의 동물을 신성시하며 벽에 그렸던 것입니다. 그 배경엔 요즘 미래의 종교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애니미즘’이 자리하고 있지요. 결국 종교와 미술, 종교와 문화는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그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업상 만나게 된 인사들의 영향이 컸다.

“소니 회장과 강화도에 함께 간 적이 있어요. 고려궁터는 물론 오래된 사찰 주변이 우리의 얼굴을 보여주는 문화와는 거리가 있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강화도에 스토리가 있는 미술관 등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가 인사동에 진입할 때는 1960년대 후반이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하수도 시설이 없어 비만 오면 길에 물이 넘쳐 흘렀다.


귀임 직전 통인오페라를 찾은 마크 리퍼트(앞줄 왼쪽) 미국대사가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오물 등을 길가에 쏟아냈지요. 길 가던 학생들이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했어요.”

그는 윌리엄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 방한 당시의 일을 잊지 못한다. 로저스 부인이 통인가게를 들렀는데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경악을 했다. 외마디 소리에 경호원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결국 로저스 부인은 숙소인 반도호텔로 돌아가 용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인사동에서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을 설치하는 계기가 됐다. 어찌됐든 그의 장사꾼 스토리는 범상치 않다.

“스물세살 때 일입니다. 선친께서 저를 호출하셨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하고 급히 가보니 평소보다 표정이 담담하셔서 특별한 뭣이 있겠구나 짐작을 했지요. 선친께서 다짜고짜 ‘오늘부터 통인은 너에게 물려준다. 더욱 성공하여 큰 회사로 만들 거라’는 중대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어 그의 부친은 “혹여 실패하면 너의 직원은 딴 회사에 가도 똑같은 대접을 받겠지만 사장인 너는 아무도 사장 자리를 안 준다”며 “그때는 리어카를 사서 동대문이나 남대문에 가서 노동을 할 각오로 임하라. 그래서라도 남 밑에 고용살이 말고 다시 개척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날 낮에 그의 부친은 주변 분들과 점심을 함께하며 어린 자식에게 사업체를 물려주었다고 털어놓았다. 돌아온 반응은 한결같았다. 너무 일러 망할 수도 있으니 지금 넘겨주지 말고 10년 후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선친께서 단호하게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제 운명의 좌표는 명확해졌지요.”

그는 유교와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집안의 막내로 장난이 심했던 어린 시절 할머니는 고전을 읽어주며 가르침을 줬다. 공자 이야기는 훈계의 단골 메뉴였다. 자연스레 공자처럼 살겠다는 생각이 몸에 스며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일 겁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과자를 먹으며 방바닥에서 이리 둥글 저리 둥글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데 노모께서 꾸중을 하셨어요. 늙은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서 추운데도 가게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젊은 너는 어찌 그리 사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순간 할머니의 말씀이 뺨을 때리듯 스쳐갔어요.”

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을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을 했다.

“무릇 장사꾼에 입문한다는 것은 스님이나 성직자들이 참고 기다리는 고행의 길 같은 것이라 여겼어요. 저는 그날 이후 휴일, 방학이 없었습니다.”

그는 요즘도 성직자의 심정으로 휴일에도 가게를 지킨다. 그것을 상인의 길로 생각하고 있다. 성직자의 수도의 길처럼.

“선친에게 고미술 감정을 배우며 장사를 시작한 셈인데 공부보다 재미가 있었어요. 때를 놓치면 배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학교 일반 과목보다 장사에 필요한 필수 과목에만 전념했어요. 무역실무와 영어, 상업 부기가 그런 것들이지요.”

한 번은 학교 선생님이 걱정스러웠는지 가정방문을 했다. 내용인즉 너의 집은 잘사는데 왜 학업을 등한시하고 상업에 몰입하는가였다. “저는 당돌하게도 돈 버는 시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을 했어요.”

특별하기 그지없는 그의 이야기가 지속됐다. 그가 열여덟살되던 어느 날이다. 통인가게 마당을 먼지 폴폴 날리며 쓸고 있었을 때 길을 가던 한 노인이 그에게 “너는 큰 부자가 되겠구나”라며 말을 건넸다. “마당이니 쓸고 있는 주제에 무슨 큰 부자가 되겠습니까”라고 그가 물었다. 돌아 온 답은 “너는 꼭 큰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20대에 꼭 돈을 벌어야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말이 제 마음에 씨가 됐습니다. 항상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분주히 뛰었지요. 그 결과 나이 스물에 고미술 감정가가 됐고, 스물두 살엔 전통을 되살린 가구를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을 했습니다.”

그의 사업 영역은 화랑과 운송, 보안창고업으로까지 확장됐다.

“선친께서 저를 믿어주신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공부하는 심정으로 또 다른 사업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목표는 인간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있게 편리를 제공하는 사업이지요.”

그가 강화도에 미술관과 박물관을 짓는 계획이 그 중심축을 이룬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죽을 각오로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편완식 미술전문 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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