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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38> 조선국왕의 건강 나들이 온행(溫幸)

입력 : 2017-04-08 09:00:00 수정 : 2017-04-07 21: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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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힘’ 담은 맑은 샘물로 질병·국정시름 말끔히 4월은 본격적인 봄의 시작이면서도 오락가락하는 꽃샘추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피로가 쉽게 몰려온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온천욕이 생각나는 시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온천지인 온양의 기원은 18년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탕정’이란 끓는 물이 솟는 우물이라는 뜻으로 온천지로서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712년 4월 통일신라 성덕왕이 온수(溫水·온양의 옛 지명)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보이며, 1082년 고려 문종이 남방 순행길에 온수를 찾아 약 15일간 머물며 온천욕을 한 기록이 전한다.

온천은 조선시대에도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 애용되었는데, 국왕이 온천을 왕래하는 소위 ‘온행’(溫幸)이 지속되었다. 태조를 비롯한 태종까지는 황해도 평산 온천을 주로 이용하였으나, 세종부터는 거리상의 이유로 충청도 온양의 온천을 선호하였다. 1432년 9월에는 국왕이 머무는 행궁인 ‘온궁’(溫宮)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세종은 풍질 치료를 위해 온양에 행차했는데, 지역의 민폐를 줄이기 위해 왕실이 이용할 욕실과 침실 공간을 건립하며 1433년 1월 완공하였다. 온천은 25칸 규모로 정무 공간인 정청(政廳), 동서에 침전(寢殿) 2곳, 온천 목욕을 할 수 있는 탕실이 남북으로 2곳 있었다. 세종은 행궁의 남북 공터에 새로 탕실과 건물을 지어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하지 않을 때에는 왕실의 탕실 한 곳까지 개방하여 민본정치와 여민동락을 실천하였다.


1796년 온양 행궁의 구조를 보여주는 ‘온천행궁도’(왼쪽). 현종과 숙종의 온행에 관하여 날짜순으로 세세히 정리한 기록 ‘온행등록’.
◆세조가 세운 온궁의 신정비


1464년 세조는 온양의 행궁에 머물면서 뜰에 있던 오래된 우물에서 맑은 샘물이 솟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 샘물에 ‘주필신정’(駐?神井)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중추원부사 임원준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고, 이숙함의 서체로 신정비(神井碑)를 새기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자성대비가 온양 행궁을 다시 방문하였다. 이때 자성대비는 신정비의 글자가 마모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수행한 임원준에게 비문을 다시 써서 새기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임원준과 이숙함이 행궁과 신정비, 명산인 광덕산, 공세(公稅) 창고가 있던 공세리 등 온양 행궁과 주변 풍경을 중심으로 지은 온양팔경시가 전한다. 


◆국왕의 온행과 지역민들의 위무


성종 연간 이후 국왕의 온행이 축소되면서 온양 행궁은 점차 쇠락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복건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이후 1665년 현종의 온양 행궁 행차가 결정되면서 행궁 터에 임금이 머무는 어실(御室), 온정실(溫井室), 온천욕을 할 수 있는 탕실을 짓고 부속 건물까지 합하여 100여칸 규모로 복건되었다. 현종이 다른 국왕에 비해 온행의 횟수가 잦은 것은 안질과 피부병에 자주 시달렸기 때문이다. 온천욕에 효험을 본 현종은 이듬해 모친인 인선왕후를 모시고 가기 위해 온양 행궁의 어실을 내정전으로 개조하고 탕실을 확장하였으며, 정무를 보는 공간인 외정전을 새로 지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온행등록’은 현종 연간 1665년에서 1669년까지 5회에 걸친 온행과 1717년 숙종의 온행에 대한 기록이다. 온행은 주로 음력 2~4월에 집중되었다. 국왕의 온천욕은 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거나 온천수를 머리부터 몸에 1000∼2000회 끼얹는 방식이었다. 현종의 경우는 눈병으로 인해 약 한 달간 온궁에서 체류하였다.

국왕의 온행에 수행하는 인원은 백관과 호위 군병 수백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행차였다. 이러한 국왕의 대규모 온행을 위해 충청도에서는 노정에서 군병 징발은 물론, 음식 지공, 온궁의 영건과 수리, 도로 및 교량의 건설과 정비 등으로 인한 재정 지출과 노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따라서 현종은 지역민들의 고충을 위로하기 위해 1665년과 1666년 온양에서 별과를 시행하여 인재를 선발하고, 지역 노인들에게 벼슬의 등급을 올려주고 음식을 제공하였다. 1717년 숙종은 온양 지역민을 대상으로 별과를 실시하여 문과 급제자 7명, 무과 급제자 200여명을 선발하기도 하였고, 영조는 1750년 9월에 요양을 위해 온행하여 충청도 지역을 대상으로 도과(道科)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고 지역민들의 조세를 감면하였다.


1483년 중각한 ‘온양 행궁 신정비’.
충청남도 제공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정조가 기록한 장헌세자의 온행 사적


영조 이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온행은 그의 피부 습창이 심해지면서 내의원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장헌세자는 1760년 7월18일 도성을 출발하여 7월22일 온양에 도착, 7월29일까지 머물렀다. 장헌세자는 온양 행궁에서 머물며 활을 쏠 때 사대(射臺)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온양군수 윤염에게 회화나무(槐木) 세 그루를 심게 하였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795년,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회갑을 맞아 부친의 온행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회화나무 주위에 대를 쌓게 하고 ‘영괴대’(靈槐臺)라고 이름 지었다. 이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 ‘영괴대기’이다. ‘영괴대기’에는 당시 온양 행궁의 전도와 단으로 쌓아 올린 영괴대 위에 울창한 회화나무 세 그루가 묘사되었고, 1795년 4월 하순 충청감사 이형원이 쓴 기문이 있어 정조에게 보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조는 1795년 10월 자신의 어필로 영괴대라 쓰고, 울창하게 자란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찬양한 어제비문을 회화나무를 심은 윤염의 아들 윤행임에게 쓰도록 지시하였다.

1796년 작성된 ‘온궁사실’에 포함된 ‘온천행궁도’에는 당시 온양 행궁의 구조를 잘 반영하였다. 행궁의 구조를 살펴보면, 궁전 담장인 궁장을 내외 이중으로 둘러 국왕과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내궁장 중앙에 왕과 왕비의 숙소인 내정전과 국사를 논하는 외정전이 있고, 그 바로 옆의 온천에는 온천수가 솟아 나오는 온정(溫井)을 가운데 둔 탕실이 있다. 탕실 좌우로 2개의 욕실을 두고 각 욕실에는 온천욕 후에 휴식하며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온돌과 서늘한 양방(凉房)을 두었다. 이러한 자료는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온행 사실과 그 유적을 보존하려 노력했던 점과 현재 터만 남아있는 온양 행궁의 사적을 살펴볼 수 있어 주목된다.

정조 연간 이후에는 왕실의 온행이 중단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왕실이 사용하던 탕실까지 개방하였고, 외정전은 19세기 후반 이미 퇴락하여 없어졌다. 이후 1870년 9월 대원군의 온양 행차를 즈음하여 함락당과 혜파정이 신축되었다. 1904년 일제강점기에는 경내에 있던 혜파정, 신정비각과 영괴대 비각만 남기고 온궁 건축을 일본식 여관인 ‘온양관’으로 개조하였고, 1927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천장의 경영권을 사들여 ‘신정관’으로 개칭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6·25를 거치면서 1956년 온궁 터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고, 결국 사유지가 되어 1967년 세워진 온양관광호텔 경내에는 영괴대와 신정비각만이 온양 행궁의 옛 자취를 전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온양 온천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일제강점기 이후 온양관이나 신정관같이 상업적 관광 온천 이미지로 고착되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행궁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4월 봄꽃이 흐드러진 어느 날 온양 온천을 찾는다면 영괴대와 신정비각과 마주하며 과거 왕실의 건강을 돌보고 백성들과 함께 동락하던 온천 행궁의 역사를 한번쯤 되새겨볼 일이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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