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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고향 제주의 화사한 색깔 같은 ‘할머니의 맛’ 그려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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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4 21:17:24 수정 : 2017-08-14 2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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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이미지·상상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전은숙 작가 오늘날 대중들은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깊이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하루 삶 속에서 이미지를 호흡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이미지의 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가진 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지와 상상력의 연구 대가인 가스통 바슐라르(1984~1962)가 이미지와 상상력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현실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은 감성이라는 것이었다. 감성의 세계가 우리가 막연하게 짐작해 왔던 것보다는 훨씬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감성의 세계는 이미지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전은숙(38)도 이미지와 상상력을 화두로 작업을 하는 작가다.

젊은 컬렉터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전은숙 작가. 그는 “힘겨운 현실이 버겁지만 작가의 길은 이제 숙명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진정 꿈꿀 줄 아는 자는 수련이 피기 시작할 때 물이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고 한 말라르메(1842~1898)의 시에 공감할 수 있다. 모네의 수련이 빛에 의해 매 순간 바뀌듯이 내면을 출렁거리게 하는 어떤 순간적인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것은 바슐라르가 이미 언급한 ‘고요한 물의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운동이 꽃들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것’과도 같다.”

그는 바슐라르가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 세계를 파악하려면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속성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봤다.

“우리의 상상력을 쥐고 있는 것은 사물(이미지)이다. 꿈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꿈을 꾼다. 물은 물의 꿈을, 바람은 바람의 꿈을, 흙은 흙의 꿈을 꾼다. 꿈꿀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무엇에도 닿지 않을 것이다. 상상력이 미래로 이끌게 된다.”

그에게 꽃은 일상의 가까운 존재이자 사물의 전형으로서의 이미지다. 그것도 디지털세대의 스티커 사진이나 셀프카메라 이미지 소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셀프카메라 시각에서 찍은 꽃 사진들을 화폭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화사한 색상과 감각적인 붓 터치는 스티커 사진을 방불케 한다. 화초에 사는 작은 거미의 시선으로 화단을 거대한 자연으로 형상화한 모습도 보인다.

“흔한 카메라의 시선이 아니라 그 안의 의인화된 사물들의 시선으로 담아보려 노력했다. 그것이 꽃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런 행보는 거침없는 붓놀림으로 감성적인 초상화를 일군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페이턴(1962~)을 떠올리게 해준다. 페이턴은 의도적으로 구성이나 조명 등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포커스가 빗나간 사진들을 현상하여 유화로 옮기는 방식을 취했다.

“우울하거나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에 심취해 있는 유명 뮤지션 등의 일상적인 모습을 붓 터치와 색감으로 드러내는 지점은 사진이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진이 담지 못하는 그 무엇을 표현하려 한다.”

‘이미지가 만든 감성이 현실과 꿈을 연결한다’는 생각으로 구상한 작품.
페이턴이 초상화를 그리듯 그는 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꽃이라는 사물을 통해 믿음 정열 이상 등을 드러내려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성균관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의 캔버스에는 화사한 색깔들이 넘실거린다. 해녀로 한평생을 살았던 할머니는 그에게 지금도 특별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만약 캔버스에 음식집을 차린다면 생일 선물로 할머니가 건져 온 해삼과 성게를 썰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문어를 삶아 먹는 기억이 최고의 추억인 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깨달았다. 그림에서 할머니의 맛을 꺼내 보이고 싶다.”

그의 관능적인 색은 해산물이라는 사물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195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바넷 뉴먼(1905~1970)은 자신의 작품을 미적으로 인식하는 ‘그림’이라기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사물’로 간주했다.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신비감과 숭고함을 체험하기를 원했다. 작품을 제작할 때 자신이 체험하고 쏟아낸 광신적, 열광적 감정을 관람객들도 동일하게 느끼기를 기대했다.

“뉴먼은 거대한 단색의 색면을 가로지르는 수직선을 ‘지퍼(Zip)’라고 불렀다. 두 개의 색면에 하나의 수직선을 그려 넣어 크기, 모양, 색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은 두 개가 아닌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체의 구성을 포기함으로써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형상이 제거된 화면은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이성 중심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이유를 이해하게 해주는 지점이다. 그는 스케치 대신 사진 이미지를 빔으로 쏴 속도감 있는 붓질로 캔버스에 잡아 둔다. 유화지만 그림물감의 용제(溶劑)인 미디엄으로 묽게 해 동양화의 모필과 수채화 붓으로 그린다. 풍성한 이미지 포착을 위해서다.

“사실 꽃의 화려함은 절박함의 소산이다. 벌을 불러 수정하기 위한 이미지 행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화려함을 선호하는 이유도 젊은 생명력에 대한 애착의 발로일 것이다. 바동바동 살아 내려는 생명의 의지가 바탕에 깔린 것이다. 이미지야말로 생명 활동 자체라는 얘기다.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허상도 아니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

최근 들어 젊은 컬렉터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무게는 버겁다. 현재 그는 철공소가 밀집해 있는 서울 문래동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도 낮에는 미술교육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휴일이나 밤 시간에 주로 작업을 한다. 인터뷰도 인사동에서 밤에 만나 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작품을 들고 힘겹게 나타난 모습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청춘들의 애처로움이었다. 그래도 지친 기색 없이 씩씩한 자세는 보는 이에게 위안이 됐다.

“이제 겨우 취향이 생겼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술가라기보다 아직도 화가를 꿈꾸는 굼벵이 같은 심정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니며 사는 것조차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가 많다. 피로감에 지치기도 한다. 예민함을 작업으로 승화시키기도 전에 곧 무디게 하는 방법으로 타협하려는 노력을 더 하는 것 같다. 서퍼(Surfer)가 푸른 물을 가르듯 그것마저도 잘라내야 하는 것이 과제다.”

예술가로 홀로서기의 처절함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그래도 해낼 것이라며 총총히 인사동 밤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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