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함녕전의 광명문 앞에서 고종의 관이 상여로 옮겨지는 장면. |
광명문이 원래의 자리를 회복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6월 시작한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찾기’ 사업을 마무리해 본래 위치인 함녕전 앞으로 되돌려놨다.
제자리를 찾은 광명문. |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덕수궁의 한 켠으로 옮겨졌고, 이후 엉뚱하게 유물 전시관 역할을 해왔다. 광명문 이전은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작업 중 이뤄졌다.
일제의 공원화 계획이 발표된 것은 1931년. 당시 덕수궁 부지가 약 6만7000㎡(2만100평)이었는데, 이 중 절반 정도인 3만3000여㎡(1만여 평)을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덕수궁의 훼철이 가장 심했던 것이 이 때였다. 1930년을 기준으로 덕수궁에 남아 있던 건물이 18동이었는데, 10동이 일시에 헐렸다. 광명문이 이전된 1938년에는 ‘이왕가 미술관’(석조전+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이 개관했고, 분수대가 만들어졌다. 이 해는 일제의 덕수궁 축소와 변형이 완료된 시점이었다.
일제는 왜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드는데 골몰했을까. 당시 경성에 제대로 된 공원이 없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으나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데는 도쿄 우에노공원 조성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19세기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복원한 메이지 세력은 300년 가까이 유지된 막부의 권위, 정통성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막부의 신성성을 상징하는 공간을 변형시킨 건 그래서였다. 도쿠가와 가문의 묘소, 도쿠가와 막부를 처음 연 이에야스를 기리는 사원 등이 자리한 곳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것이 우에노 공원이다. 즉, 일제의 덕수궁을 비롯한 조선궁궐 공원화 정책은 우에노 공원의 경험을 반영해 이전 체제인 조선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복원’ 대상, 조원문이 중요한 이유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보자.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광명문이고, 왼쪽에 처마만 살짝 보이는 건 ‘조원문’(朝元門)이다.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로 원래는 근접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광명문 제자리 찾기가 덕수궁 복원정비 1단계의 주요 내용 중 하나라면, 조원문 복원은 2단계의 핵심 사업으로 꼽을 수 있다.
엉뚱한 자리에서나마 형태를 보전한 광명문과 달리 조원문은 지금 모습을 볼 수 없다. 정확한 훼손시점은 알 수 없다. 다만 1913년 이왕직사무실이 만들어지기에 앞서 철거되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2015년 수정된 덕수궁 복원정비 계획에 보면 덕수궁의 중심영역 복원에서 조원문은 우선 대상이다. 조원문을 되살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문이 조선시대 궁궐 조성의 기본 원칙을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궁궐을 조성하며 ‘삼문체계’를 적용했다.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展)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문을 배치하는 것이다. 창덕궁의 보완기능을 한 창경궁을 제외하고 경복궁(광화문-흥례문-근정문), 창덕궁(돈화문-숙정문-인정문), 경희궁(흥화문-건명문-숭정문)에 적용된 궁궐 조성의 원칙같은 것이었다. 덕수궁의 삼문체계는 정문인 대한문과 중화전 앞의 중화문 사이에 조원문을 둠으로써 완성됐다.
조원전 복원은 2022∼2029년 진행되는 2단계 사업에 포함돼 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주변 중심영역 복원에서 ‘우선’ 대상이며 문화재청은 2027년 복원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일제의 공원화 계획이 발표된 것은 1931년. 당시 덕수궁 부지가 약 6만7000㎡(2만100평)이었는데, 이 중 절반 정도인 3만3000여㎡(1만여 평)을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덕수궁의 훼철이 가장 심했던 것이 이 때였다. 1930년을 기준으로 덕수궁에 남아 있던 건물이 18동이었는데, 10동이 일시에 헐렸다. 광명문이 이전된 1938년에는 ‘이왕가 미술관’(석조전+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이 개관했고, 분수대가 만들어졌다. 이 해는 일제의 덕수궁 축소와 변형이 완료된 시점이었다.
일제는 왜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드는데 골몰했을까. 당시 경성에 제대로 된 공원이 없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으나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데는 도쿄 우에노공원 조성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19세기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복원한 메이지 세력은 300년 가까이 유지된 막부의 권위, 정통성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막부의 신성성을 상징하는 공간을 변형시킨 건 그래서였다. 도쿠가와 가문의 묘소, 도쿠가와 막부를 처음 연 이에야스를 기리는 사원 등이 자리한 곳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것이 우에노 공원이다. 즉, 일제의 덕수궁을 비롯한 조선궁궐 공원화 정책은 우에노 공원의 경험을 반영해 이전 체제인 조선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광명문과 조원문. |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보자.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광명문이고, 왼쪽에 처마만 살짝 보이는 건 ‘조원문’(朝元門)이다.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로 원래는 근접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광명문 제자리 찾기가 덕수궁 복원정비 1단계의 주요 내용 중 하나라면, 조원문 복원은 2단계의 핵심 사업으로 꼽을 수 있다.
엉뚱한 자리에서나마 형태를 보전한 광명문과 달리 조원문은 지금 모습을 볼 수 없다. 정확한 훼손시점은 알 수 없다. 다만 1913년 이왕직사무실이 만들어지기에 앞서 철거되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2015년 수정된 덕수궁 복원정비 계획에 보면 덕수궁의 중심영역 복원에서 조원문은 우선 대상이다. 조원문을 되살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문이 조선시대 궁궐 조성의 기본 원칙을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궁궐을 조성하며 ‘삼문체계’를 적용했다.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展)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문을 배치하는 것이다. 창덕궁의 보완기능을 한 창경궁을 제외하고 경복궁(광화문-흥례문-근정문), 창덕궁(돈화문-숙정문-인정문), 경희궁(흥화문-건명문-숭정문)에 적용된 궁궐 조성의 원칙같은 것이었다. 덕수궁의 삼문체계는 정문인 대한문과 중화전 앞의 중화문 사이에 조원문을 둠으로써 완성됐다.
대한문에서 조원문, 중화문을 지나면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에 이른다. |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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