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중심주의로는 관계 개선 실마리도 못 찾아”
일본 정부의 고위 당국자가 일제강점기 한국인 징용 피해자 소송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16일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전날(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징용 피해자 소송 문제를 언급하며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촉구한 데 대한 일본 정부의 첫 반응인 셈인데 다소 냉담해 보인다.
요미우리신문 보도에 따르면 익명의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 내용에 대해 “(한국 측이) 협의에 응한다는 자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일본에 양보를 강요하는 종래 입장에 변화는 없다”고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대화가 중요한 것이라면 (한국이 먼저) 구체적인 해결에 이를 수 있는 안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요미우리는 또 “위안부 문제 등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문재인정부와는 관계 개선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는 일본 외무성 간부의 발언 내용도 보도했다.
전날 제7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의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 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다”고 발언했다. 일본 정부에 대화를 촉구한 점은 전향적이나, 대법원 판결에서 비롯한 한일 관계 악화의 책임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다는 종전 입장은 그대로인 셈이다.
일본 정부는 그간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명령한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비판해왔다.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문구가 포함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면서 “이 협정에 부합하는 해결책을 한국 정부가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한국 원고 측은 배상 채권 확보를 위해 법원 허가를 얻어 피고 기업인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에 나설 수 있다. 이 경우 보복 조치 단행을 불사하겠다는 것이 일본 입장이다. 구체적으로 관세 인상, 일본 금융기관에서의 한국 기업에 대한 대출·송금 중단 등 다양한 보복 조치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국내 한일 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일본 정부가 징용 소송 문제로 보복을 강행하면 한국 정부도 맞대응에 나설 것”이라며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된다면 한일 관계는 사실상 파탄 지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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