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만t급 경항공모함 사업에 밀려 잊혀졌던 핵추진잠수함 건조 문제가 대선 국면을 맞아 수면 위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24일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국방 공약을 발표하면서 “공고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핵 위협에 대비해 장기간 수중매복과 감시 정찰이 가능한 원자력(핵) 추진 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핵추진잠수함 건조는 2017년 제19대 대선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했으나, 4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핵추진잠수함 대신 경항모 사업을 적극 추진, 기본 설계 착수에 필요한 72억 원을 내년도 정부예산에 포함한 상태다.
하지만 차기 대선이 다가오면서 핵추진잠수함 보유가 또다시 거론되고 있다. 한국을 가입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배타성이 강한 프리미엄 멤버십과 같은 핵추진잠수함 보유국의 반열에 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실현만 된다면 호주의 핵추진잠수함 보유를 가능하게 한 오커스(AUKUS)와 유사한 국제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건조는 가능…‘청구서’ 대응은 ‘글쎄’
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과 더불어 핵추진잠수함 건조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 지목되어 왔다.
재래식 잠수함 20여 척을 건조한 경험을 통해 최소한의 잠수함 산업 생태계를 구축한 한국은 잠수함용 원자로 개발과 핵연료 조달, 전력공급계통 구축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독자 건조는 가능하다는 평가다.
한 국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핵기술을 확보하겠다고 나서면 국제사회는 이를 제지할 수 없다. 제재도 압박도 소용없다. 북한과 인도, 파키스탄의 핵보유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핵보유국들이 이미 확보한 기술을 자체적으로 얻으려면 막대한 시간과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연구개발이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일정 지연에 따른 재정의 추가 투입도 불가피하다. 인도가 핵추진잠수함 보유를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진국, 특히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미국이 동의하면 군사적 목적의 핵연료 사용을 제한하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의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관련 기술과 핵연료 확보에 큰 도움이 된다.

이 후보도 이를 의식, 핵추진잠수함 보유와 관련해 “미국과 실질적 협의가 있어야 한다. 호주에도 예외를 인정해서 건조한다니까 한미 간에 충실한 협의를 통해 충분히 그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청구서’다. 미국이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조건 없이 허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 외교, 군사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청구서 종합세트’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오커스를 통해 핵추진잠수함을 얻은 호주는 어떨까. 호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밀착하고 있다.
호주는 오커스 결성 직후인 지난 9월 미국과의 협상에서 미군 항공자산의 호주 순환 배치를 통한 공군 협력 확대, 미 해군과 해병대 병력 순환배치, 미사일 개발 협력을 비롯한 군사교류 강화, 대만과의 관계 강화, 중국 해경국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한 해경법 반대, 신장위구르 문제 등에 대해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토니 애벗 전 호주 총리는 지난 10월 대만을 방문해 차이잉원 총통과 안보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호주는 자국의 5G 사업에서 화웨이의 참여를 배제했고, 오커스 결성 이후에는 중국 투자 자본금에 대해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감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을 겨냥한 ‘민주주의 연대’ 행보에서 선봉장 역할을 맡은 셈이다.
1970년대부터 10여년 동안 미국의 핵기술을 지원받은 프랑스는 냉전 시절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에 찬성했고, 프랑스군의 작전을 미군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유사시 공항과 항만 제공을 약속했다.
한국은 어떨까. 앵글로색슨 정보동맹체 ‘파이브 아이스’의 일원으로 오랜 기간 미국과 신뢰관계를 구축한 호주의 전례로 볼 때, 한국은 호주보다 더 많은 조건이 담긴 ‘청구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대중국 견제의 선봉장 역할에 더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인정, 신장위구르와 홍콩 문제,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등이 더해질 수도 있다. 중국의 강한 반발과 보복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차기 정부가 이를 감당할 ‘내구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있고, 미국의 ‘선택적 핵확산’ 정책이 오커스 결성을 계기로 뚜렷해진 상황을 감안, 한국이 역내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미국에 반대급부로 내놓을 ‘카드’의 장단점을 살피면서 핵추진잠수함 건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경항모는 어쩌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실행에 옮기게 되면, 경항모 사업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2033년 전력화를 목표로 추진중인 경항모는 내년에 기본 설계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 절차에 돌입한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2025년에 기본 설계가 완료된다.
정부가 현재 공식적으로 밝힌 사업비는 2조원. 하지만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사업타당성조사에서는 2조6500억 원으로 나타났다. 설계 및 건조 과정에서의 리스크 문제, 함재기로 쓸 F-35B 수직이착륙 스텔스전투기와 항공무장 등까지 감안하면 총사업비는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핵추진잠수함은 경항모 못지 않게 거액의 건조비가 소요된다. 프랑스 쉬프랑급(5300t급) 핵추진잠수함은 척당 가격이 1조6000억 원에 달한다. 3척을 만든다면 약 5조원이 든다.
경항모 1척, 핵추진잠수함 3척 건조비를 합치면 7조~8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병사 급여의 지속적인 인상, 부사관과 군무원 채용에 따른 인건비 증가, 비전투임무의 민간 전환에 따른 예산까지 더해지면 국방예산 내에서 고정비 비중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만큼 전력증강에 쓸 수 있는 예산은 줄어든다. 만약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면 일반적인 방위력개선사업처럼 접근하기보다는 범정부적 차원의 우선순위 조정 등을 통한 ‘교통정리’를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추진 중인 경항모 사업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여전한 상황에서 차기 정부가 이를 중단하려면,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철저히 따져봐야
대선에 출마하는 정치인은 병사 처우나 인권 관련 분야 외에 안보 공약을 제시할 때, 1조원이 넘는 규모의 전략무기 도입을 거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략무기 도입은 한국군의 군사력이 강화됐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국방은 과시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사일방어와 전략적 타격능력 강화, 연합작전계획 보완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 7월 이임한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쓴소리는 한국의 국방에서 가장 보완이 시급한 분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25일 미국의소리(VOA)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이 전략 타격능력을 획득하고 한국형 통합 공중미사일방어 체계를 개발해 배치해야 한다. 이것은 솔직히 많이 뒤쳐져 있다”고 지적했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지난 2일 한미가 안보협의회(SCM)에서 합의한 작전계획 최신회를 위한 새 전략기획지침을 승인한 것과 관련, “이미 오래전에 시행됐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8년 11월 부임 뒤 새 작전계획의 필요성을 확인해 2019년 여름 전략기획지침 갱신에 대한 공식 요청서를 제출했지만, 그해 SCM에서 한국 국방부는 이에 대한 필요성을 지지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새 작전계획의 필요성에 대한 평가를 한국 국방부와 미국 국방장관실에 제공했지만 “2020년 4월 한국 국방부는 연합사령관으로서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핵추진잠수함은 전략적 효과가 뛰어나지만,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한국군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전작권 전환의 ‘키’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이에 맞는 전력증강이 이뤄져야 한다. 경항모 사업이 숱한 논란을 겪었던 전례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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