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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영토론은 철저하지 못했고, 자학사관 표현은 아직 남아있다.’
일본 문부과학성 교과서 검정 결과에 대한 일본 보수 매체 산케이신문 평이다. 지난달 30일 열린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공동 주최 긴급 세미나 현장에서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산케이 신문의 이같은 보도를 전하며 말문을 열었다. 산케이 신문이라는 일본 극우 스피커의 주문을 통해, 일본의 장구한 역사왜곡사(史)를 엿볼 수 있고, 일본 극우세력이 목표하는 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 문제는 일회성 진실 부정이나 정치 망언 차원에서 나아가, 아예 자라날 미래세대의 사고 구조 자체에서 역사왜곡을 체계화, 구조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한·일 양국 내 양심세력의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온 이유다.
남상구 실장은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왜곡 발단부터 현재까지 개괄하면서 “‘자학사관’이란 표현은 일본 내 극우세력에 의해 2000년대 들어 많이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교과서문제를 보면 일본 내에서는 1957년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남 실장은 “당시 (일부 교과서 검정) 탈락 이유는 ‘과거사실을 반성하려는 열의가 지나쳐 학습을 통해 선조의 노력을 인식하고 일본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이고 민족에 대한 풍부한 애정을 키운다는 일본사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며 “1969년에는 난징대학살을 기술했는데 정부가 ‘일본에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들추어 낼 필요는 없다’라는 검정 의견이 붙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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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나가 사부로 교수는 1965년부터 일본 교과서 검정제도는 위헌이라고 소송을 했고, 이 소송은 1997년까지 32년간 이어졌다. 이때 일본 교과서 문제는 일본 내부의 문제였는데 1982년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국제문제가 된다.
남 실장은 “아사히 신문이 교과서에 ‘중국 침략’이란 기술을 정부가 나서서 ‘중국 진출’이라고 썼다고 해서 문제가 된다. 이를 계기로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3·1운동도 폭동이라고 쓴 것이 드러난다. 소위 ‘교과서 파동’이다. 이떄 우리가 독립기념관을 만들어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하니 우리도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자고 대응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때 중요한 것은, 일본이 사태를 수습하면서 ‘근린제국조항’을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근현대 역사적 사실을 기술할 때에는 국제 이해와 국제협력의 차원에서 필요한 배려를 하겠다는 조항”이라고 덧붙였다.
남 실장은 “일본이 남의 나라 교과서 문제에 왜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고 하지만, 일본이 1982년에 근현대 역사적 사실은 우리 멋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국제이해와 국제협력에서 필요한 배려를 하겠다라고 했기에 일본 교과서문제는 일본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 피해국가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기술도 조금씩 개선됐다. 그는 “교과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병합’과 한국인의 저항, 식민정책과 피해, 3·1운동과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난징대학살, 황민정책 강요, 강제동원 등이 기술되기 시작했고, 1996년에는 일본 검정을 통과한 모든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기술된다”고 설명했다.(일본 입장에서 합리화 또는 미화 성격의 단어에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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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내 기술이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며 개선되는 것을 일본 우익이 가만 두지 않았다. 이른바 ‘자학사관’이라는 반격이다. 아이들에게 자학적인 역사관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우익 정치인들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위한 모임을 만드는 등 조직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앞장선 아베 신조는 총리가 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는 민간이 한 행위라는 주장을 펴는 등 정치적 망언과 역사왜곡을 지속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1년 우리나라에서는 이신철 대표를 필두로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우익 교과서 불채택,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 추진 운동 등을 펼쳤다.
일본 정부는 교과서 검정 권한을 통해 일본 내 역사가들의 양심에 따른 집필 결과를 삭제, 수정해온 것에서 나아가, 아예 집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적극적 개입에 나서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무엇을 쓰지 말라’는 개입에서, ‘이렇게 쓰라’는 개입으로까지 온 것이다.
남 실장은 “2000년대 들어 독도, 센카쿠 제도, 북방영토에 대해 정부의 입장을 반영해 기술하도록 하고, 강제동원, 위안부 관련 기술은 축소되는 상황에서 2018년 학습지도요령이 개정됐고 그게 어떻게 교과서에 반영되고 영향을 주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오늘의 단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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