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사크·여우족 원주민 출신 만능선수
5종·10종 경기 우승 1년 후 실격처리
과거 프로야구선수 경력 찾아내 징계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결정 불복 탄원
IOC, 1982년 공동 우승 판결 내렸지만
40년 걸친 탄원… 단독 우승 인정받아
1986년에 나온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의 경쟁자로 나왔고, 병환 중임에도 올해 새로 나온 ‘탑건: 매버릭’에서도 잠깐 얼굴을 비쳤던 배우 발 킬머의 근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화려한 목걸이가 눈에 띈다. 흔한 남성용 골드 체인 목걸이가 아니라 각종 보석과 금속 장식이 많이 붙은 여러 줄의 목걸이들을 가득 걸고 있는 발 킬머 사진이 많다. 그는 후두암 수술 후에 착용하는 인공후두 기기를 가리기 위해 목에 스카프를 매는데, 화려한 목걸이는 이 스카프와 잘 어울리는 장신구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목걸이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발 킬머는 미국 원주민(인디언) 피가 섞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킬머의 증조모가 체로키 인디언이었기 때문에 킬머의 아버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인디언 문화에 익숙했고, 영화 배우로 활약하면서도 인디언 혈통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워낙 인종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보니 혼혈의 역사도 길고,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알기 힘든 다양한 피가 섞인 사람들이 많다. 캐머런 디아즈, 앤젤리나 졸리, 조니 뎁 같은 영화 배우는 물론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원주민의 혼혈이고, 지미 헨드릭스도 마찬가지.
이렇게 잘 알려진 인물이어도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걸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원주민의 후손인 걸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렇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혹은 미묘하게 사회적 차별을 겪는 일도 있다. 지난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12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선수 짐 소프(Jim Thorpe)가 5종 경기와 10종 경기의 단일 우승자(금메달)라고 발표했다. 무려 110년 전에 있었던 경기의 우승자를 밝힌 배경에는 소프 선수의 기록을 정정해달라는 미국 원주민 커뮤니티의 오랜 탄원과 노력이 있었다. 짐 소프는 누구이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진정한 기록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짐 소프는 미국의 사크와 여우(Sac and Fox)족 원주민 출신 천재 운동선수였다. 부모가 각각 백인과 원주민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클라호마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나 자랐고, 학교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던 인디언들을 위한 칼라일 공업대를 졸업했다. 그의 운동선수 경력은 칼라일 미식축구팀에서 시작되었는데, 무명의 칼라일이 당시만 해도 최강 팀 중 하나였던 하버드대 팀을 상대로 승리한 전설적인 경기에서 짐 소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전미(All-American) 선수에 두 번이나 뽑혔다.
하지만 단지 미식축구를 잘해서 천재 운동선수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여해 육상에서 두 종목 우승을 했을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 돌아온 후부터 1919년까지 세 개의 메이저리그 야구팀에서 프로로 활약했는데, 그러던 도중 1915년에는 프로 미식축구에도 진출해서 14년 동안 여섯 개의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만능 운동선수였다. 큰 인기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미식축구로 끌어낸 공로로 1920년에는 프로 미식축구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고, 대학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훗날 체육기자들이 그를 ‘20세기 전반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기도 했다.
그의 운동 실력과 투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그가 올림픽에서 경기 후에 찍은 사진인데, 잘 보면 그가 두 발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경기 직전 누군가 그의 한 켤레밖에 없는 운동화를 훔쳐 가는 바람에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운동화 한 짝을 오른쪽에 신었고, 다른 한 짝은 팀 동료에게서 빌려 신은 모습이다. 주운 오른쪽은 너무 커서 양말을 겹으로 신어야 했고, 빌린 왼쪽은 너무 작아 발이 터져 나올 듯 보인다. 이런 신발을 신고도 우승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1912년 당시만 해도 온통 백인 잔치였던 올림픽에서는 눈에 띄는 유색인종이었다. 달리기와 던지기, 높이뛰기 종목을 모아서 경쟁하기 때문에 육상의 꽃이라고 하는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 출전해 1위를 해서 금메달을 받았지만 일 년 후 IOC는 그가 과거에 월급 몇 푼을 받고 야구선수로 뛴 기록을 찾아내 아마추어 정신에 어긋난다며 실격 처리했고, 그의 메달 기록은 사라져 버렸다. 운동으로는 먹고살 수 없었던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넉넉한 집안의 대학생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취미를 살려 출전하는 대회였던 걸 생각하면 소프에 대한 IOC의 판결은 여러모로 차별적이었고, 무엇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결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소프는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연명했고, 1951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올림픽에서 받은 대우가 부당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꾸준히 탄원을 한 끝에 IOC는 1982년에 한 걸음 물러나 그의 금메달은 인정하되, 당시 기록상으로는 2위였지만 1913년의 실격 처리로 금메달을 받게 된 사람들과 공동 우승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만족하지 않고 “단독 금메달을 인정하라”는 탄원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무려 40년, 소프가 세상을 떠난 후로 71년 만인 지난 7월에 “짐 소프는 1912년 올림픽에서 5종 경기, 10종 경기의 단독 우승자”라는 결정이 나온 것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