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국가 기치로 편협된 예술관 강요
강렬한 퍼포먼스로 파괴적 전쟁 선동
대중 사로잡기 위한 상징적 연출 즐겨
히틀러와 미학의 힘 - 대중을 현혹한 파괴의 예술가/ 프레더릭 스팟츠/ 윤채영 옮김/ 생각의힘/ 3만7000원
“다리우스건, 아우구스투스건, 루이 14세건, 스탈린이건 절대 권력자들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예술을 조작하고 거대한 건물을 지어 압도하려 한다. 자기 주장과 자기 숭배를 동기로 삼는다. 자신의 낭비에 어떤 제약이 걸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미학을 활용한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지배를 규정하고 정당화한 이도 그가 유일하다. … 문화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플라톤처럼 예술을 통제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비극이 있다. 차라리 그가 무솔리니처럼 예술에 아무 관심도 없고 무지한 속물이었더라면, 그는 덜 파괴적이었을 것이다.”(606쪽)
히틀러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그를 반유대주의와 학살, 전쟁과 파괴를 일으킨 정치적 인물로만 다루어 왔다. 그러나 히틀러는 인종주의만큼이나 예술에 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단순한 권력욕의 결과로 본다면 이 커다란 비극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히틀러는 자신을 예술가로 여겼다.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독일과 유럽을 재건하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건축,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비전을 펼쳤으며,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국민을 결집하려 했다. 전쟁은 그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설령 유럽이 붕괴되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더라도 그에게 파괴는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히틀러의 예술가적 면모는 리더십 스타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뉘른베르크 당대회를 비롯한 장대한 퍼포먼스와 상징적인 연출을 즐겼다. 그의 연설은 철저히 연출된 이벤트였으며, 이를 통해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 효과가 히틀러의 특기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독일 대중에게 퍼레이드, 페스티벌, 헌정식, 기념식, 경례, 횃불 행렬 같은 정교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는 제작자, 감독, 무대 디자이너, 그리고 주연 배우를 맡았다. 행사의 세부 사항들을 직접 챙겼다. 압도적인 시청각 효과─수천 개의 깃발과 기치, 페넌트, 장식 리본 그리고 플래카드, 이러한 것들이 보여주는 수천의 색상, 조명과 서치라이트, 횃불 행진이 자아내는 기대감, 군악대와 기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전율, 팡파르, 사이렌, 축포 그리고 축하 비행이 주는 흥분─이 모든 것들로부터 연타당한 군중은 거의 넋이 나가버렸다.”(112쪽)
히틀러는 밤 시간대의 조명을 활용한다거나, 빨강과 검정의 스바스티카 깃발로 연단을 장식하는 등,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정치적 성공 요소였다. 이러한 퍼포먼스가 대중에게 정치 참여 감각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대중을 파괴적인 전쟁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독일을 ‘문화 국가’로 재건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모든 예술과 문화를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특히 모더니즘 예술을 독일 문화의 타락으로 여기며, 이러한 예술이 유대인의 영향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이 언론과 예술평론 등으로 모더니즘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독일의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이 모더니즘 예술을 구매하고, 이로써 경제적 이익을 챙기며, 독일의 문화적 순수성을 해친다고 비난했다. 이는 예술계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큐비즘, 다다이즘, 표현주의 등을 ‘타락한 예술’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같은 화가들은 히틀러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작품이 제거되고 전시가 금지되었으며, 퇴폐미술전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에는 65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이후 파괴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전통적인 미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유대인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탄압은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망명을 택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제3제국의 문화국가 비전’이란 히틀러 자신의 예술관을 독일 국민에게 강요한 것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독일 예술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문화국가라는 비전을 내세운 히틀러가 정작 예술과 문화에서도 파괴를 가져왔던 셈이다. 게다가 반유대주의는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제3제국 정책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결과는 다 아는 바처럼 커다란 비극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히틀러의 예술관과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 이 책이 말하는 비극의 이면이다. 히틀러의 예술가적 기질은 그의 인간적 면모보다는 그가 지닌 파괴적 힘과 창조적 열망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책에 담긴 수많은 인용문과 풍부한 사진 자료들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정치의 예술화’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합이 경우에 따라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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