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생각과 시선에 민감하다. 동의하지 않아도, 다수가 좋다고 하면 자신의 뜻을 접고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뒤 싱크탱크인 포퓰리스를 세워 활동 중인 토드 로즈는 저서인 ‘집단 착각’에서 “인간에게 모방하고 순응하는 본능이 있다”고 했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침묵한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도 그런 예다.
권위와 품위를 상실한 정치권에선 더 그렇다. 지난해 정부의 ‘2030 부산 엑스포’ 유치가 실패했을 때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119표를 쓸어 담은 것과는 달리 부산이 고작 29표의 찬성표밖에 얻지 못한 것을 두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고는 “현실에 눈을 감고 ‘벌거벗은 임금님’ 귀에 달콤한 정보만 올라간 결과”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금도 이런 평가는 바뀌지 않는다.
나라 밖도 다를 바 없다. 지난해 6월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그룹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중에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주도했다. 반란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놀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반란 직후 처음으로 TV를 통해 대국민연설에 나설 정도였다. 정권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독재자 푸틴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소릴 들어야 했다. 체코 수도 프라하엔 ‘벌거벗은 살인마’라는 이름의 푸틴 조형물이 등장했다.
지난달 27일 있었던 미국 대선 후보 첫 TV토론이 재선 도전의 꿈을 가진 조 바이든 대통령을 무너뜨렸다는 데 이견은 없다. 토론에서 바이든은 어눌하고 쉰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고,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놨다. 민주당 안팎에서 사퇴 요구가 들끓었고 미국 유수 언론도 ‘부적격’ 딱지를 붙였다. 급기야 그는 21일 대선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애국적 결단’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작지 않다. 그동안 고령에 따른 자신의 인지력 저하를 잘 몰랐던 건지, 모른 척했던 건지, 아니면 주변에 진실을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건지. ‘벌거벗은 임금님’ 신세가 돼 버린 바이든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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