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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통틀어 상록수(常綠樹)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낯익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해 잣나무, 전나무, 동백나무 등이 상록수로 분류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도 결코 푸르름을 잃지 않는 상록수를 보며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소설가로 활약한 심훈(1901∼1936)이 대표적이다. 일제 치하의 피폐한 농촌에서 주민 계몽운동에 나선 청춘 남녀들의 숭고한 헌신을 그린 작품에 ‘상록수’라는 제목을 붙였다. 소설은 병약한 동료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은 주인공이 상록수를 응시하며 ‘오직 농민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전남 진도 첨찰산에 있는 상록수림. 겨울을 포함해 사철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상록수라고 부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93년 김영삼정부는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일환으로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군대를 보냈다. 1960년 유럽 국가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소말리아는 1990년대 들어 군벌들 간의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해져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원이 꼭 필요한 상태였다. 한국 입장에선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첫 유엔 PKO 참여란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다.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엔군의 참전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한국이 이제 유엔의 이름 아래 다른 나라를 돕게 된 것이다. 육군 공병이 주축이 되어 250여명 규모로 편성된 한국 최초의 PKO 부대 이름은 바로 ‘상록수 부대’였다. 헐벗고 척박한 소말리아 땅을 푸르름이 넘치는 옥토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상록수’는 소설뿐만이 아니고 민중가요 제목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유명하다. 잠시 가사 일부를 음미해보자.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거친) 들판에 솔잎 되리라.”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선거 광고에 출연해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는 모습을 선보였다. 고졸 학력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변호사로 자수성가해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그의 인생사가 녹아 있는 듯한 절절한 노래에 많은 유권자가 감동을 받았다. 2009년 수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서울광장에 울려 퍼진 곡 역시 상록수였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명곡 ‘상록수’와 ‘아침 이슬’을 만든 김민기(1951∼2024) 전 극단 학전 대표. 연합뉴스

다수 음악인들은 상록수를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논할 때 ‘아침 이슬’과 더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라고 평가한다. 상록수와 아침 이슬 둘 다 극단 학전(學田) 대표를 지낸 김민기가 작사, 작곡을 도맡았다. 상록수의 경우 1978년 가수 양희은이 처음 발표했을 때의 제목은 ‘거치른(거친)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었다고 한다.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그 때문인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상록수와 아침 이슬을 만든 김민기가 21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보수와 진보 등 성향을 불문하고 모든 언론이 하나 돼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으니 근래 문화계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평생 정치와 거리를 두고 한결 같았던 고인의 상록수 같은 삶에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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