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녹아 있는 골목 풍경 발길 이끌어
소뼈·고기 끓인 설렁탕 대표 향토 음식
듬뿍 담긴 고기에 소면 사리 입맛 돋워
뜨끈한 국물에 밥말아 든든하게 한끼
젓갈향 진한 아삭한 김치와 환상 궁합
◆동대문 상가와 설렁탕
동대문은 유년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동네다. 부모님은 창신동 공장에서 일하며 쪽방에서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다. 동대문과 종로에서만 이사를 참 많이 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큰 도로 중앙에 우뚝 선 동대문. 그 당시 경찰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자동차들과 동대문을 둘러싼 경사진 담벼락의 푸른 잔디들을 보는 것이 어린 시절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부모님께서는 참 열심히 사셨다. 하루도 재단판과 미싱 소리가 멈추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끼니때면 꼭 가족끼리 스테인리스 밥상에 모여 함께 밥을 먹었는데 시집올 때 할아버지가 사주셨다는 그 밥상은 녹 하나 없이 튼튼한 채로 우리가 이사 가던 집들을 다 따라다니더니 지금은 내 아들의 장난감 상이 되어 거실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그 당시에 어머니는 사골국을 자주 끓이셨다. 한 솥 가득 끓여낸 뒤 뼈 삶은 냄비에 물을 채우고 다시 끓여 여러 번 먹을 수 있는 그 음식이 가족의 식사를 책임지는 워킹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스무 살,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 일을 배운 적이 있다. 동대문 상가 거리에서 원단이나 자재를 나르는 일을 했었는데 디자이너나 공장에서 샘플 자재를 가져오면 동대문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레이스며 단추며 염색이며 찾아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물건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일이 적성에 맞을까 고민하며 그만두고 싶었을 때 항상 망설였던 건 동대문 시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밥집들 때문인 것 같다. 지금 간다면 과연 찾아갈 수 있을까 싶은 골목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던 생선구이집이나 뼈해장국집, 백반집 등 노포들은 스무 살이던 내게 동대문을 지날 때면 사골국물 우리듯 계속 생각날 정도로 진득한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오랜만에 동대문 근처 방산시장을 찾았다. 조금 선선해진 날씨에 장보기용 오토바이를 타고 마장동 넘어 청계천 길을 따라가는 길, 어느덧 높아진 푸른 하늘에 심취했을까. 아직은 따가운 한낮의 햇볕에 등은 땀으로 젖어갔다.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 허기진 배를 달래고 옛 추억을 더듬어 가며 음식점을 찾았다. 이미 많이 달라진 동네를 하염없이 돌아다니다 그냥 집에 가려던 찰나 지나칠 수 없는 비주얼의 설렁탕집이 보였다. 경사길 가옥을 개조한 느티나무 설렁탕은 담쟁이넝쿨에 둘러싸인 채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내 발길을 이끌었다. 안쪽까지 가득 찬 땀을 뻘뻘 흘리며 설렁탕을 먹는 손님들의 표정과 바깥 주방에 거대한 곰솥이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당당히 보여주는 듯했다.
◆느티나무 설렁탕
약간의 기다림 후 곧 자리에 앉았다. 밀어닥친 손님들에 지친 홀 직원들의 모습이 잠깐 안쓰럽게 느껴진 찰나, 먹음직스러운 김치와 깍두기 항아리가 나왔다. 먹을 만큼 접시에 덜어낸 후 김치를 먼저 한입 베어 물었다. 진한 젓갈 향, 아삭한 김치의 식감과 더불어 올라오는 자신 있게 짭짤한 그 맛. 옛날 전라도 전통시장, 오래된 반찬집에서 먹어봤던 그 맛이다. 이 김치만 있어도 밥 한 공기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익은 배추만큼 김칫소의 맛이 좋았는데 한입에 입에 침이 고이는 깊고도 그리운 맛이 났다.
곧 설렁탕이 나왔다. 소면 사리가 함께 나온 설렁탕은 고기가 듬뿍 담겨 있는데 국물의 사골향이 참 식욕을 돋운다. 간이 되어 있지 않은 설렁탕 국물을 먹어보았다. 끈적이는 감칠맛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송송 썰어 나온 대파와 소금, 후추를 치고 소면을 넣어 풀어 헤쳤다. 뜨겁던 국물이 먹기 좋은 온도로 식는데 국물과 소면을 덜어낸 후 밥을 절반 정도 말아 놓았다. 후루룩 소면을 먹고 난 후 설렁탕 국물을 머금은 쌀밥에 김치를 얹어 먹으니 진정 탕의 정석을 맛보는 것 같았다. 기다린 시간보다 빠르게 먹고 나온 후 가게를 몇 번이나 뒤돌아봤다. 동대문에 올 때면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집에 가는 길이 행복했다.
◆설렁탕
설렁탕은 소의 뼈와 고기를 끓여 우려낸 탕으로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다. 신라 시대 때부터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로 국을 끓여 백성들이 나눠 먹으면서 유래되었다. 선농단에서 준 탕이라 하여 ‘선농탕’으로 불리다 지금의 설렁탕으로 변하게 되었다. 설렁탕은 양지나 사태, 도가니, 사골 등을 활용하며 끓인 재료들을 썰어 국과 함께 낸다. 설렁탕은 단출한 모습에 비해 정성이 많이 들어가고 원가가 높은 편이다. 재료의 질과 양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전통 방식으로 끓인 설렁탕은 맛이 진하다 못해 깊어 누린내가 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설렁탕은 대파 고명이 필수로 들어간다. 비슷한 음식으로는 곰탕이 있다. 곰탕은 사골이 아닌 고기로만 끓여 국물이 맑다. 설렁탕은 끓일 때 소금으로 밑간을 하고 곰탕은 간장으로 밑간을 한다.
■아롱사태 수육 만들기
<재료>
아롱사태 1개, 무 500g, 마늘 3톨, 대파 1줄, 물 3ℓ, 간장 30㎖, 건고추 1개.
<만드는 법>
① 아롱사태는 흐르는 찬물에 1시간가량 씻는다. ②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인다. ③ 물이 끓기 시작하면 바닥에 고기를 깔고 무로 덮은 후 마늘과 대파, 건고추를 넣고 3시간가량 은은히 끓인다. ④ 국물에 간을 하고 고기를 꺼낸다. 식힌 국물에 고기를 다시 넣어 보관하고 차갑게 식힌 후 썰어 낸다.
김동기 다이닝 주연 오너 셰프 Paychey@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