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전구체 관련 기술 ‘국가핵심기술’ 판정 신청 ‘새 국면’ 예고
‘글로벌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술과 2차전지 핵심소재 기술을 보유한 ‘거대 기업’ 고려아연의 경영권 확보를 둘러싼 전쟁이 치열하다. 고려아연은 26일 오전 10시 기준 시가총액 15조원에 달하는 코스피 상장사로, 다수의 핵심소재 기술을 보유한 국가 기간 기업이다.
두 회사가 ‘의사결정 최고기구’인 이사회 구성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검찰 고발과 소송 등으로 ‘적법성 여부’를 따져보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두 회사 간 다툼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 ‘헤어질 결심’…75년 동행 마침표 찍은 두 기업
영풍그룹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은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세운 회사다. 현재 영풍그룹과 전자 계열사는 장씨 일가가,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각각 경영을 맡고 있다. 영풍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이하 MBK)와 손을 잡고 이달 13일부터 고려아연에 대한 주식 공개매수에 나선 상태다.
MBK는 영풍 및 장형진 영풍 고문 일가 등과 주주 간 계약을 체결해 의결권을 공동행사하기로 하고 영풍 및 특수관계인 소유 지분 일부에 대해서는 콜옵션을 부여받기로 한 상태다. 이를 통해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지분을 영풍 및 특수 관계인보다 1주 더 갖게 된다. 영풍과 장씨 일가 지분은 33.13%로 추정된다.
MBK의 특수목적법인(SPC) 한국기업투자홀딩스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약 7∼14.6%(144만5036주∼302만4881주)를 공개매수한 뒤 회사 경영권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밝힌 상황이다. 이에 따른 공개매수 대금은 약 2조원에 달한다.
고려아연 측은 사외이사 3명만 남은 ‘비상경영체제’인 영풍 이사회가 보유 중인 고려아연 지분 절반 이상을 MBK파트너스(이하 MBK)에 처분하는 중대한 결정을 한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최윤범 회장 측은 배후에 장형진 고문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고려아연은 이달 20일 보도자료를 내고 “대표이사 2명이 모두 구속된 상태에서 도대체 누가 어떻게 결정을 내린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쏟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풍 이사진 5인 중 사업 총괄 박영민 대표와 석포제련소장을 맡은 배상윤 대표가 지난달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돼 공백 상태인 점을 꼬집었다.
대구지검 안동지청은 23일 박 대표를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배 제련소장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각각 구속 기소했다. 원·하청 임직원 8명은 비소 누출 당시 통제 의무를 위반한 혐의(산업안전보건법·화학물질관리법 위반)가 적용돼 불구속기소 됐다. 앞서 영풍 석포제련소는 2014년부터 중금속으로 토양 및 수질을 오염시켰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환경부가 조사에 나섰고, 낙동강으로 카드뮴이 유출된 정황을 확인해 2021년 영풍에 과징금 281억원을 부과한 바 있다.
영풍은 최근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 등의 결정은 적법한 이사회 결의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영풍 측은 지난 23일 “고려아연 주식 공개 매수 등 결정은 적법한 이사회 결의에 따른 것”이라며 “이번 사안의 경우에도 이사회를 개최하여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충실히 설명하고 상법에 따른 이사회의 결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원아시아파트너스의 사모펀드 투자 관련 배임’,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 관여’ ‘이그니오홀딩스 인수 관련 선관주의 의무 위반’ 등 최윤범 회장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그 배경에 이사회 기능 상실이 있다고 역공을 펼쳤다.
투자업계에서는 영풍 이사회 존재감이 희미해지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장 고문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영풍은 지난 12일 낸 보도자료에서 “지난 75년간 2세까지 이어져 온 두 가문 공동경영의 시대가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장 고문 입장을 기술한 바 있다.
현재 영풍 사외이사 중 1인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신규 선임된 인물이다. 다른 사외이사의 경우 기업의 경영과 전혀 무관한 이력을 보유한 인물로 영풍의 제련업은 물론 기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성이라는 평도 나온다. 현재 영풍 사외이사진에는 회계법인 청 대표를 지낸 박병욱 회계사, 박정옥 사회복지법인 설원복지재단 이사, 최창원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초빙교수가 포진해 있다.
◆ 안팎에선 MBK의 경영권 인수 시도 우려…고려아연 기술인력들 “사표 불사”
고려아연 안팎에선 MBK의 경영권 인수 시도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앤컴퍼니와 휴스틸, 한국금거래소 등 80여개 고객사들은 이달 23일 ‘고려아연 품질 유지 요청서’를 발표하고 “사모 펀드는 투자 수익 확보를 위해 독단적 경영을 할 가능성이 크고 향후 투자를 줄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고려아연의 주요 생산 제품인 아연, 연(납), 귀금속, 반도체 황산을 공급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일부 고객사는 국내 최고 기술이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최고기술책임자·CTO)을 비롯한 핵심 임직원 20여명도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영풍과 MBK의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 시도에 대해 “약탈적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부회장은 최창근 고려아연 명예회장의 입사 동기이자 40년간 고려아연의 성장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이 부회장은 “MBK가 고려아연을 차지할 경우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고 대한민국의 산업 경쟁력이 저하될 것”이라며 “고려아연의 모든 임직원은 이번 적대적 M&A를 결사코 막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MBK가 경영권을 잡을 경우 집단적으로 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저항할 뜻도 밝혔다.
이 부회장은 특히 영풍의 장 고문을 향해 “모든 책임이 있다”고 날을 세웠다. 이 부회장은 “영풍 석포제련소의 경영 실패로 환경 오염과 중대 재해를 일으켜 국민에게 빚을 졌으면서도 이제 와 기업사냥꾼과 손잡고 고려아연을 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영풍과 MBK는 장담하건데 고려아연을 경영할 수 없다”며 “우리와 함께 고려아연을 지켜달라”고 국민과 주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대해 장 고문은 24일 한 매체와 인터뷰서 “고려아연은 우리 아버님 세대가 만들었지만 그게 꼭 우리 손에 의해서만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라며 “고려아연은 주인이 어떻게 바뀌든지 영원히 잘 가길 바라고 또 바란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개매수에 성공해도 “(고려아연의)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MBK가 최 회장이 추진하던 사업을 그대로 이어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 고려아연 “영풍 이사회 구성 적절성 따져야”…영풍,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배임 혐의 ‘맞고소’
고려아연 주요 관계사 영풍정밀은 지난 19일 배임 혐의로 영풍 장형진 고문과 사외이사 3명, MBK 파트너스 법인과 김광일 부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영풍정밀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일가가 최대주주인 회사다. 영풍 지분 4.39%를 보유하고 있다. 고려아연과 함께 영풍정밀도 MBK·영풍의 공개매수 대상이다.
검찰은 고소장 접수 하루 만에 이 사건을 공정거래조사부(부장검사 김용식)에 배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회장 측은 영풍 이사회 적법성에 대한 법원 판단도 받아보겠다는 입장이다. 최회장 측은 이사회의사록 열람 등사 청구와 회계장부 열람 등사 청구 및 경영협력계약 무효 확인 가처분 등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영풍 이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도 제기해 절차적 위법성을 부각하고 있다.
MBK와 영풍은 고려아연에 대해 회계장부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영풍이 제기한 의혹은 △원아시아파트너스가 운용한 사모펀드 투자 관련 배임 △SM엔터테인먼트 주가 조작 관여 △이그니오홀딩스 투자 관련 선관주의의무 위반 등이다.
이는 앞서 고려아연 측이 장형진 영풍 고문과 MBK를 고소한 데 대한 맞대응으로 해석된다. 영풍은 원아시아파트너스 사모펀드 투자, 해외 자회사 이그니오 홀딩스 관련 투자 결정, 씨에스디자인그룹과의 계약 체결 등 그간 최 회장을 겨냥해 제기해 온 의혹을 고소 이유로 꼽았다.
씨에스디자인그룹에 대해선 최 회장 인척이 운영하는 것으로 의심되는데 고려아연이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이 있다며 "불공정거래행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앞서 영풍은 지난 3월 고려아연이 현대차그룹의 해외 계열사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 형태로 신주를 발행한 것을 두고 서울중앙지법에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7월에는 고려아연의 황산 취급 대행 거절 조치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또 지난 13일 고려아연 회계장부 등의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19일에는 최윤범 회장과 박기덕·정태웅 대표 등에 대한 자기주식 취득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25일에는 최 회장과 노진수 전 대표이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업무상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 고려아연, 국가핵심기술 신청…경영권 분쟁 ‘새 국면’
양측이 ‘맞고소’로 대립하면서 치열한 법적 다툼이 예고된 가운데, 고려아연이 정부에 국가핵심기술을 신청하면서 양측의 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고려아연은 지난 2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국가핵심기술 판정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전문위원회 개최 등 내부 검토 후 절차를 밟아 판정이 나올 예정이다.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경제 안보 등의 이유로 정부 승인이 있어야 외국 기업에 인수될 수 있다. MBK의 향후 구상에 타격을 입하는 동시에 첨단 산업을 뒷받침하는 핵심 국가기간 기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은 전자,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 국내 첨단 산업에 다양한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공급망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고유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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