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시점
기계적 ‘회귀’라는 폄훼 옳지 않아
문화유산 보존방식 정답은 없어
우리나라 문화유산 정책을 비판할 때 흔히 동원하는 말이 ‘박제’란 단어다. ‘박제’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동물의 가죽을 곱게 벗기고 썩지 아니하도록 한 뒤에 솜이나 대팻밥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문화유산이 박제품이 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모양만 그럴듯하지 실제로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할 수 없어서 생명력이 없다는 뜻이리라.
지난달, 자신을 ‘프랑스 국립 건축가’라고 소개한 임우진씨는 한겨레신문 ‘문화재 보존과 박제의 차이’란 제목의 글에서, 프랑스와 한국이 옛 건축물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건축 문화유산 보존 원칙은 ‘원형 그대로’라면서 이는 ‘박제품’을 양산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올해 파리올림픽에서 펜싱과 태권도 경기장으로 사용된 ‘그랑팔레’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때 건축된 후 “세기를 관통해 수많은 행사를 주최했던 곳이고 그때마다 보수와 개조를 함께해 온 곳”임을 강조하면서 화재 후 복구된 숭례문은 “최대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일종의 ‘회귀 본능’이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만 하는 것만이 정답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숭례문은 “도심지의 고풍스럽고 멋진 장식품” 혹은 “시각적 도시 조각품”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정책을 ‘그랑팔레’와 ‘숭례문’ 사례를 단순하게 대비하면서 ‘칭찬과 비판’ 또는 ‘부러움과 자조’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임씨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한국의 문화유산 보존 정책을 비판했지만, 여기서 ‘원형’은 건축물이 세워진 최초의 모습, 혹은 ‘최대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기계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문화유산을 수리 혹은 복구할 때 ‘원형’은 최초 혹은 최대한 옛 모습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시점의 모습을 뜻한다. 건축물은 건립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용자의 새로운 요구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 2008년 화재 후, 숭례문 복구 때의 원형은 숭례문이 조선조 한양도성의 남대문으로 역할을 다한 마지막 모습, 즉 고종 때의 모습을 상정했다.
숭례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태조 7년(1398) “도성 남문이 완성되어 임금이 가서 보았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있다. 또, 세종 29년(1447) ‘세종실록’에 의하면, “숭례문을 새로 지었다(新作 崇禮門)”고 했다. 세종은 숭례문의 산세가 낮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산세를 높일 것을 명했기에 숭례문을 해체한 후 기존 기초 위에 석재를 덧대어 기초를 높이고 땅을 북돋운 다음 숭례문을 다시 세웠다. 이후, 성종 10년(1479) 숭례문을 크게 고쳤으며, 고종 5년(1868)에는 경복궁 중건 중 숭례문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이 각각 ‘숭례문 상량문’과 ‘고종실록’에 있다. 기록에는 없지만 이외에도 5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크고 작은 수리가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이후 일제의 영향력 아래,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방문에 맞추어 성벽이 해체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수리가 1961∼1963년에 있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가 있었다.
‘원형’을 사전적 의미로 최초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태조 때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조 때의 모습으로 숭례문을 복구하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세종 이후 모든 왕의 행위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변형과 해방 후 수리를 거치며 생긴 변형은 숭례문을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목적, 즉 조선 시대 한양도성 남대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1908년 설계하고 이듬해 완공한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위치한 ‘메이어 메이 하우스’의 수리와 보존 실례를 살펴보자. 1922년 이 집의 주인 메이는 늘어난 가족을 위해 집을 증축했고, 1955년에는 메이 이후의 거주자가 집을 개조하면서 차고를 증설했다. 한국의 국가유산청 격인 미국의 ‘내셔널 파크 서비스’는 1985년 ‘메이어 메이 하우스’를 수리하면서, 이 집의 원형은 라이트가 설계한 1909년 모습이라고 보고 나중에 개조되고 증축된 부분은 철거했다. 이 집을 수리하고 보존한 목적이 라이트의 ‘프레리 하우스’(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초원에 납작하고 길쭉하게 지어 수평선을 강조한 모양의 집)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집에 살았던 메이가 미국 역사상 중요 인물이었으면, 그가 증축한 1922년의 모습대로 수리해 보존했을 수도 있다.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복구 사례도 마찬가지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직후, 프랑스 정부는 국제 공모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과 현대적인 공법으로 복구할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올해 개최된 파리올림픽 전에 복구를 완료할 수 없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화재 직전의 모습(19세기 중반 복원한 모습)으로 복구했다. 현시대 사조를 존중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코앞에 닥친 올림픽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건축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방법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그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과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해당 유산의 성격 등에 따라 해법은 각양각색이다. 이 세상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어디 있으랴.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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