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 프랑스 항공사 닷소(Dassault)가 개발한 라팔 전투기는 21세기 들어 프랑스 공군과 해군에 납품되며 프랑스군의 주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해외 수출 실적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2002년 한국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선정 당시 미국산 F-15에게 패한 것이 대표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리비아, 싱가포르, 브라질, 핀란드, 모로코, 스위스 등의 차세대 전투기 도입 사업에서도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이 가운데 모로코와 스위스는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는 등 프랑스와의 문화적 관계가 긴밀하다. 그런데도 미국산 전투기를 쓰기로 한 결정에 프랑스는 커다란 실망감을 토로했다.
그랬던 라팔이 몇 년 전부터 세계 무기 시장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현재까지 인도, 이집트, 카타르, 그리스, 크로아티아, 아랍에미리트(UAE), 인도네시아 등이 라팔을 구매해 이미 실전에 배치했거나 앞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가장 최근에는 세르비아가 지난 8월 프랑스산 라팔 전투기 12대 구매 계약 체결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세르비아 국빈 방문에 맞춰 이뤄졌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라팔 클럽의 일원이 되어 기쁘다”며 “결단을 내려준 프랑스 대통령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라팔 클럽’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으니 그 인기를 새삼 실감한다.
이른바 ‘라팔 클럽’의 면면을 보면 세르비아처럼 미국과 사이가 껄끄러운 나라가 몇몇 눈에 띈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대신 나름의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주로 포함돼 있다. 일단 라팔의 종주국인 프랑스부터가 그렇다. 왜 그럴까. 라팔은 100% 프랑스 기술로 제작됐다. 기체는 프랑스 기업 닷소, 전자장비는 탈레스, 엔진은 사프란이 각각 담당한다. 이렇다 보니 고장이 나거나 부품이 부족할 때 미국의 도움에 기댈 필요가 전혀 없다. 인도처럼 자국 군대 운영과 관련해 미국의 간섭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나라들 입장에선 제법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랫동안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로 통했다. 그런데 사우디 정권의 인권 탄압 실태를 문제삼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임기 동안 두 나라 사이는 냉랭해졌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의 마크롱이 2일부터 2박3일 일정의 사우디 국빈 방문에 돌입했다. 사우디 왕세자이자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총리와 만난 마크롱 대통령은 “양국 간 국방, 경제, 에너지, 문화 분야 협력을 강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간 사우디가 라팔 전투기 구입을 검토 중이란 보도가 꾸준히 나왔기에 혹시 이번에 계약 체결 공표가 이뤄지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외신은 “마크롱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기간 동안 라팔에 관한 발표는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마크롱과 빈 살만 두 냉혹한 협상가 간에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한 밀고 당기는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사우디를 상대로 한 프랑스의 라팔 외교가 과연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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