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경유 가스관 운송 중단 위기
총리가 직접 나서 푸틴에 도움 요청
젤렌스키 “유럽 공동의 안보 침해”
유럽연합(EU) 회원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이면서도 친(親)러시아 노선을 걷는 동유럽 슬로바키아가 우크라이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간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해 온 슬로바키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가스 공급이 끊길 처지에 놓이자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는 “슬로바키아는 러시아산 가스에 눈이 먼 나머지 유럽 공동의 안보에는 관심이 없다”고 맞받았다.
23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유럽 국가들로 가는 가스관 운송 계약을 오는 2025년 1월1일 종료할 계획이다. 해당 가스관은 그간 전쟁 중에도 러시아산 가스를 필요로 하는 유럽 국가들을 위해 운영돼왔다. 그런데 러시아가 가스를 팔아 번 돈이 전쟁 수행에 쓰이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사실 다수 유럽 국가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EU의 대러 경제 제재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했다. 대신 러시아 이외의 다른 국가들로 가스 공급선을 다변화했다. 문제는 내륙 국가인 슬로바키아의 경우 물류비 폭증 등을 이유로 러시아산 가스에 계속 의존해왔다는 점이다.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이 끊길 처지가 된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지난 22일 모스크바로 황급히 달려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났다. 푸틴과의 정상회담 후 피초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겨냥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슬로바키아로 가는 가스 수송에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슬로바키아에 가스를 계속 공급하려는 러시아의 의지를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발끈했다. 슬로바키아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우크라이나가 물류비 충당 등에 쓰라며 거액의 보상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피초 총리는 슬로바키아 국민을 위한 우리의 보상을 원치 않는다”며 “러시아에 대한 슬로바키아의 가스 의존을 끝내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피초 총리를 향해 “그토록 모스크바에 의존하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며 “이것은 슬로바키아는 물론 유럽 전체에 심각한 안보 문제를 제기한다”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슬로바키아에 제안했다는 보상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피초 총리는 우크라이나가 밝힌 보상 규모는 5억유로(약 7558억원)라고 소개했다. 그것도 우크라이나가 직접 보유한 자산이 아니고 대러 경제 제재로 압류된 러시아 자산이라는 게 피초 총리의 주장이다. 그는 심지어 “젤렌스키 대통령이 ‘5억유로의 러시아 자산을 보상할 테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찬성하겠느냐’고 묻길래 당연히 ‘절대로 안 된다’고 답했다”는 폭로성 발언까지 했다.
피초 총리는 2023년 10월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친러·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며 정권을 잡았다. 그는 취임 직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슬로바키아의 무기 지원을 중단하는 등 친러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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