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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35주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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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1-22 18:11:03 수정 : 2025-01-22 1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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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정부 시절인 1988년 4월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대한민국은 ‘천하사분지계’(天下四分之計) 시대가 열렸다. 총 299석 가운데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이 125석, 김대중(DJ)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이 70석, 김영삼(YS) 총재의 통일민주당(민주당)이 59석, 김종필(JP)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35석을 각각 얻어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4당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원내교섭단체가 4개로 늘어난 것도 뜻밖이지만, 여당이 원내 과반(150석 이상)에 한참 못 미치는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된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입장에선 이른바 ‘3김(金)’이 똘똘 뭉쳐 정부에 맞서면 각종 법률안과 예산안 통과는 물론 헌법기관장 인사조차 불가능한 궁지로 몰렸다. 당장 세 야당은 1988년 7월 노 대통령이 지명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며 거야(巨野)의 위력을 톡톡히 보여줬다.

1990년 3당 합당을 단행한 민주당 김영삼 총재(왼쪽부터), 민정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 대회장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당원들의 환호에 호응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사법부 수장에 앉히는 데 실패한 뒤 노 대통령은 이른바 ‘정계 개편’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무리 대통령 중심제 국가라고는 하지만 국회에 정부를 지지하는 안정적인 과반 의석이 없다면 대통령의 권력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1988년 후반부터 노 대통령은 YS와 JP를 상대로 활발한 물밑 접촉에 돌입했다.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고 강력한 여당을 만들려는 취지였다. 노태우정부 시절 정무1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낸 박철언 전 의원이 노 대통령과 야당 총재들 사이에서 밀사(密使) 역할을 맡았다. 박 전 의원은 심지어 DJ와도 만나 민정당과 평민당의 합당까지 포함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 같은 정치권 내부의 움직임은 언론도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죽하면 1990년 1월4일 어느 일간지 1면에 ‘여야가 대연정을 모색한다’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겠는가.

 

다만 이 ‘대연정’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가 막판 쟁점으로 부상했다. YS와 JP는 민정당과 힘을 합치는 방안에 긍정적이었다. 허나 대연정에 DJ까지 참여시키는 것에는 부정적 입장이 확고했다. 박 전 의원은 2005년 8월 펴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YS와 독대하며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YS는 “노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으나 DJ에 대해선 “믿을 수 없고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며 거리를 뒀다. JP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노 대통령은 DJ도 어떤 식으로든 대연정의 틀 안에 포함시키려는 의사가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고 문 목사 배후에 DJ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일이 꼬였다. 이른바 ‘공안 정국’이었다. 보수 진영 내부에 DJ 비토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노 대통령으로선 ‘DJ까지 끌어안을 수는 없다’는 강경파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90년 1월22일 3당 합당을 공식 발표한 공화당 김종필 총재(왼쪽부터), 민정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환한 표정으로 함께 이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인 1990년 1월22일 노 대통령과 YS 그리고 JP가 청와대에 모여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이로써 원내 과반은 물론 개헌까지 가능한 재적의원 3분의 2도 훌쩍 뛰어넘은 219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2년 남짓 이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종료했고 그간 제1야당 대표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한 DJ는 원내 70석에 불과한 소수 야당 지도자로 쪼그라들었다. 당시만 해도 3당 합당은 ‘여대야소 복원을 위해 국민이 총선으로 만든 여소야대 구도를 허문 배신의 정치’라는 비판을 들었다. 3당 합당 후 처음 치러진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이 149석에 그치며 원내 과반 확보에 실패한 점만 봐도 민심이 차갑게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회에 맞선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해 직무가 정지되고 급기야 구속까지 된 작금의 상황에 비춰보면 3당 합당은 정치적 파국을 막기 위한 묘수(妙手)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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