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 9일까지 이어지는 올해 설 연휴 기간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승객이 134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해외로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지갑 사정으로, 취업 준비로, 명절 잔업으로 ‘집콕’을 선택한 당신. TV를 켜도 죄 비슷한 프로그램뿐이고 유튜브 보는 것도 지겨워졌다면, 소설가가 쓴 여행책과 함께 ‘방구석 세계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먼 나라에 발 딛지 않고도 때로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마드리드 일기(최민석, 해냄, 2만2000원)
“이 글은 숙소 창문에서 갑자기 떨어진 블라인드를 손 봐주겠다고 하고, 오지 않는 직원을 기다리다 지친 채 쓰고 있다. 어제 낮, 고대했던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소설가 최민석이 2022년 9월1일부터 써내려간 스페인 ‘마드리드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교환 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돼 두 달여 동안 마드리드에 머물게 된 작가는 매일 일기를 썼다.
작가는 마드리드에 발 디딘 첫날부터 매일 보고 겪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소박하게 전한다. 잠시라도 농담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듯, 혹은 독자를 한 페이지에 한 번은 웃기겠다는 사명을 품은 듯. 푸시시 헛웃음이 삐져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일기를 채운 주재료다.
두 달간 다닐 서반아어 학원에 등록한 날. 원어민 선생님은 클래스 수강생들에게 작가를 소개한다. “요즘 한국 대중문화가 관심을 많이 받는데, 마침 한국 작가가 왔네요. 스페인 정부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작가로 왔대요.” ‘정부의 초대를 받아 왔다’는 말이 어쩐지 거창하게 들려, 작가는 끼어들고 만다. “다 선생님 세금입니다!” 선생님은 돌연 얼음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시베리아처럼 쌀쌀해진 강의실 공기를 깨고 한 유럽인 수강생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거에 선발되는 거야? 네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야?“ “정부 복지 사업이라, 제일 불쌍해 보이는 사람 보내주는 거야.” 이번에는 학생들까지 얼음조각이 되어버렸다.
가을에도 35도를 웃도는 뜨거운 도시, ‘시에스타’(낮잠)와 ‘피에스타’(축제)가 공존하는 풍경 속에 녹아든 작가는 마드리드의 따뜻한 이웃들과 어울리며 어느새 마드리레뇨(마드리드 사람)이 되어 간다.
어학원에 다니며 ‘이걸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소설 집필을 못해서 문학적 궤도에서 멀어질 뿐인데 왜 공부하려 하는가’라고 스스로 묻던 저자는 말한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한데 순수한 즐거움을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전해준다.”
마드리드를 떠나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를 여행하던 저자는 언젠가 서반아를 다시 찾기로 다짐한다. 명소로 이름난 도시, 코르도바와 세비야엔 가지 못했지만, 저자는 말한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쉬워서 좋다. 가고 싶은 모든 여행지를 가버리면, 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은 도달하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과 갈증이니까, 이 아움이 소멸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 보려 한다.”
◆나의 폴라 일지(김금희, 한겨레출판, 1만8500원)
“오래 전부터 남극행을 꿈꿔온 이상한 소설가.” 김금희가 말하는 김금희다. 독자들이 앞으로 쓸 작품의 공간을 궁금해할 때 ‘남극’이라고 조심스레 고백하곤 했다는 그는 몇 년간 여러 경로로 남극행을 시도했으나 여러 경로로 거절당했다. 남극에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없는 것’ 때문에 그곳에 가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곳엔 지폐가 없고, 인간이 거의 없으며, 인위적인 국경이나 지리적 경계가 없다. “인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이 없는 자연 속에서 나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인간종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어보기를 원했다.”
수년의 기다림 끝에 작가는 남극 세종과학기지에 두 달간 체류할 기회를 얻는다. 극지연구소에서 파견하는 하계 연구 대원이 받는 생존 교육과 안전 교육을 2023년 여름 내내 받고 2024년 2월, 지구 반대편 칠레 푼타아레나스를 거쳐 꿈에 그리던 남극에 도착한다.
되도록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아야 하는 곳에 낯선 존재가 발을 들인다는 건, 부지불식간에 남극 생태계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균·식물·벌레 이동의 매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작가는 남극의 피조물들과의 적정 거리에 골몰한다. 그리고 그 거리로부터 안정감을 찾는다.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이 이웃하고 있는 펭귄 마을. 위험과 공포와 배고픔, 바위에 긁히는 상처와 레오파드 해표(바다표범)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해안가 펭귄들을 보며 그는 말한다. “지구를 한참 돌아 펭귄들 앞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을 손쉽게 얻은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나는 해변에서 생각했다. 펭귄과 나, 그리고 흰풀마갈매기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나는 그런 우리의 ‘거리’가 평화롭게 느껴졌다.”
추위와 바람에 덜덜 떨다가도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는 해표들을 보면 마음은 녹는 듯 포근했다고 작가는 썼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아기 펭귄들의 다정한 인사를 뒤로하고 남극을 떠나며, 작가는 자신이 그토록 남극행을 원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닫는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수많은 생명체가 만들어낸 꿈결 같은 일상을 간직한 채 작가는 현실로 되돌아간다.
서울과 세종기지 사이 물리적 거리만큼 먼 것이 세종기지의 기초과학 연구자들과 대중 사이의 거리다. 세종기지에 대한 피상적 이미지 외에, 그곳에 파견된 전문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왜 연구하는지 알 방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김금희의 충실하고 꼼꼼한 체류기는 이 거리를 획기적으로 좁히도록 돕는다. 남극의 옵서버로서 이보다 안성맞춤인 인물은 아마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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