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관에 재개봉 물결이 인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도 이번 겨울 그 밀물을 타고 돌아온 영화다. 뒤늦은 한파가 오기 전 문득 눈 쌓인 겨울 풍경이 귀해졌다는 생각에 스크린 가득 설경이 담긴 ‘러브레터’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3년 전 산에서 조난으로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라 다카시)를 그리며 졸업 앨범에서 찾아낸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에 답장을 보낸 이는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죽은 연인과 학창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녀 이츠키에게 히로코는 청한다. ‘당신의 추억을 나눠 주세요.’

여자 이츠키의 플래시백에서 펼쳐지는 건 옛 시절의 작은 소동이다. 이름이 같아 빚어진 오해나 짓궂은 장난 탓이 아닌 사건 중 하나는 육상대회 장면이다. 도서위원이면서 육상부원이기도 했던 남자 이츠키는 대회 전 다리를 다쳐 선수로 출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날 선수복을 입고 등장한 그는 트랙 안쪽에서 다른 선수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여자 이츠키는 관중석에서 사진부원의 카메라를 건네받아 다른 누구보다 그 장면을 더 가까이 지켜본다. 그리고 사건은 관중의 탄식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다. 다친 발 때문에 중심을 잃은 남자 이츠키가 다른 선수와 부딪치며 나동그라진 것이다. 기막힌 충돌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는 여자 이츠키가 들고 있던 카메라에서도 일어난다. 오작동한 카메라에서 연속 촬영 셔터음이 들리며 넘어지는 남자 이츠키의 모습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겨진다. 소란 속에서 여자 이츠키는 아무것도 못 본 체한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실수를 사진으로 남기고 말았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하지만 무엇보다 숨기고 싶었던 건 카메라에 눈을 고정한 채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자 이츠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날의 사건은 실수담으로 기억되어 히로코에게 전해진다.
영화의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끼워둔 도서 카드가 뒤늦게 여자 이츠키에게로 도착한다. 뒷면의 그림은 소년이 연필로 그린 소녀의 모습이다. 수백수천 개의 선을 그을 때마다 되새겼을 소녀의 얼굴은 그림을 그린 소년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제야 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여자 이츠키에게 실수로 찍힌 사진의 기억은 비로소 추억이 된다.
영화관 로비를 둘러보면 가끔 재개봉 영화 포스터가 눈에 띈다. 영화관이 문을 닫고 줄어든 상영관조차 채울 새로운 이야기가 모자라다는 방증일지, 스크린으로 만나지 못했던 옛 영화를 이렇게라도 마주함을 반가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이다. ‘러브레터’를 본 후 이런 생각도 한 켠에 떠오른다. 기억이 추억이 되어 불러일으킨 향수야말로 어쩌면 누군가를 다시 영화관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르겠다고.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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