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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책장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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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13 23:06:41 수정 : 2025-02-13 23: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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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모은 책 1만 여권
무형의 기억과 시간의 집합체
미련 없이 정리하기 쉽지 않아
모두 비워내기가 마지막 숙제

설 연휴 동안 책을 정리했다. 책 정리는 우리 부부에게 묵은 숙제였다. 대학생 때부터 35년 동안 모은 장서가 1만여권 정도 된다. 아내 역시 문학을 전공해서 우리의 결혼은 책장의 결합이기도 했다. 아파트 거실 벽면은 물론 안방과 베란다까지 책장이 들어서 있다. 책이 날로 늘어 장서 앞에다가 이중으로 눕혀 쌓은 책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책 무덤이다.

큰아이가 십대 때 “이게 집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는 소파가 놓이고 벽에 텔레비전이 걸린 여느 집 거실들이 부러웠을 것이다. 한창 재미에 빠진 프라모델을 조립해 근사하게 전시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그 말을 듣고 난 후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 정리를 벼르고 있었다. 그게 십 년째였다.

전성태 교수 소설가·국립순천대교수

젊었을 적에 간혹 오십에 이른 선배 작가들이 책장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는 했다. 하나같이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그러나 마치 자녀를 출가시킨 사람처럼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그때는 그 소회를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다. 특히나 오십에 이른 작가들이 왜 책장 정리를 감행하는지 의문으로 남았다.

그간 경험에 비추어 책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뭐든 쉬 버리지 못하고 쟁이는 버릇 탓도 있지만 책마다 사연 없는 게 없다. 자료적 가치가 있는 책은 논외로 치고, 아직 못 읽은 책은 언젠가 읽을 거잖아, 하고 버틴다. 이미 읽은 책은 과연 나와 나눈 감흥을 버릴 수 있을까, 하고 팔짱을 낀다. 몇 번 대대적인 정리를 시도했다가 끝내 손을 든 까닭이다.

책장 앞에 서서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십대 작가들의 결단이 얼핏 이해가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읽지 못한 책들은 아마 앞으로도 읽지 못할 것이다. 독서의 감흥이 젊은 날 같지 않기도 하다. 책은 내가 모은 재산이 아니라 무형의 기억이거나 시간이기 십상이었다. 오십대는 직업이며 생이며 그 막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는 나이일 테고, 더러 무망한 꿈처럼 포기하는 것들도 생길 것이며 책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상자를 넉넉히 준비해 두고 배수진을 쳤다. 과감히, 미련 없이 책을 추려서 버리자.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우선 저자가 정성스럽게 서명해 준 책이 많았다. 나에게 선물한 책이 헌책방 같은 데 굴러다닌다는 걸 작가가 알게 되면 얼마나 섭섭할 것인가. 간혹 이런 곤혹을 짐작한 듯 작가 이름만 써서 보낸 분도 있었다. 앞으로 나는 포스트잇 같은 데에다가 서명해서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서명이 들어간 책이 설령 헌책방에서 거래된다고 해도 섭섭해 말자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책장 정리를 시작하고 사흘째 되는 날 컨테이너를 빌릴 수 있었다. 한시적이지만 나는 그곳에 책을 보관하기로 했다. 책을 버리지 않고 옮긴다고 생각하니 정리가 수월해졌다. 나는 과감하게 책장을 비워 나갔다. 3000권 정도의 책을 집에서 빼냈다. 책을 영구히 보관할 공간을 얻지 못하면 아마 저 책들은 다시 내 서재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임시보관이라는 핑계를 대고 나는 책을 유기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정리하자 다 큰 아이들이 “책을 버리는 거냐?”고 아쉬워했다. 나에게는 의외였다. 나는 어디 시골에다가 작업실을 구해 서재를 꾸밀 거라고 말했다. 두 아이에게 책을 유산으로 받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 모두 유산으로 받겠다고 했다. 큰아이는 시집들을 받기로 했고, 나머지는 작은아이가 갖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 책들을 정리하고 가는 일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아내는 늙으면 벽난로 있는 집에서 책을 다 읽고 한 권씩 태우자고 꿈꾸듯 말했다.

 

전성태 교수 소설가·국립순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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