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인간 문명이 사그라진 미래… ‘새로운 존재’ 형상화하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입력 : 2025-02-17 22:00:00 수정 : 2025-02-17 20:00:30

인쇄 메일 url 공유 - +

오묘초, 상상된 미래의 지구 생명체

2022년 발표 ‘누디 헬루시네이션’
기억 상품화된 세상 지성체 표현
최근 ‘딱 걸린 진화의 현장’ 작품
가상적 존재 태동 포착해 만들어
22일까지 송은미술대상전서 선봬

◆생명을 닮은 조각의 유연한 생존법

투명하거나 반짝이는, 낯선 형태의 덩어리들이 전시 공간 곳곳에 돋아난다. 수직 수평의 반듯한 평면에서 꿈틀대며 솟아오른 변종들은 주위의 빛을 투과하거나 반사하며 주어진 풍경을 재편한다. 생명의 몸처럼, 때로 뼈처럼 자라난 조각의 부피를 마주하며 살아 있는 숨과 그렇지 않은 공기의 다름을 질문해 본다.

오묘초(41)는 2020년부터 기억이라는 비물질을 조각의 물질성으로 번안하는 데 천착하여 왔다. 앞선 2018년 학계에 보고된 바다달팽이의 기억 전이 실험을 하나의 소재로 삼으면서다. 해당 연구는 기억이 신경세포의 핵에 존재하는 일종의 물질이며, 따라서 전이와 이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2022년에 발표한 ‘누디 헬루시네이션’ 연작은 그러한 기억이 상품화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상상된 지성체를 형상화한 조각들로서 그가 집필 중인 소설의 세계관에 바탕하여 제작되었다. 이어 2023년 ‘변형 액체’는 지구 생태계 속 “물질적 적응과 생존의 현실”, 나아가 유기체와 무기물 사이 균형에 관한 주제로 초점을 이동시켰다. 유리 등 광물을 주 재료로 삼는 일련의 조각은 각각의 물질 사이, 또한 인간과 비(非)인간 사이 섬세한 관계 맺기의 과정을 요구한다.

오묘초의 ‘누디 헬루시네이션’(2022) 연작.

오묘초의 작품세계 내에서 개념적 배경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미지의 공간을 상징하는 ‘심해’이다. 그는 개별 물질의 녹는점과 끓는점, 강도와 유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율하는 과정 가운데 심해의 생명을 떠올린다. 서로 다른 물질을 인공적으로 접붙여 새로운 심미적 형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작업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바다 아래 존재들을 연상하는 것이다. 셀 수 없는 불가능성을 극복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진화의 결실들, 우연이자 필연처럼 지구상에 공존하는 갖가지 유기체의 신비로운 메커니즘을 말이다.

최근의 작가노트에서 오묘초는 “극한의 압력과 어둠 속에서 번성하는 생명체들은 삶의 적응성과 지속 가능성을 나타내며, 변형과 재생의 순환을 상징한다”고 언급한다. 달리 말하면, 작가가 주제 공간으로 설정한 심해라는 장소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사이에 놓인 삶의 시간을 극적으로 빛내어 보여주는 일종의 무대인 셈이다. 해저의 고압을 견디기 위한 방도로써 가장 연약하고 유연한 막을 피부로 취하는 심해어처럼, 여리고 투명한 피막을 입은 조각들은 자신이 속한 물리세계의 상(象)을 흡수하거나 횡단시키며 주위의 환경에 효과적으로 녹아든다. 특유의 조형은 연약한 유기체의 역설적 지구력과 생존력을 은유적으로 지시한다.

◆상상된 미래의 지구 생명체

“모든 것이 멸망한 후, 인간의 흔적조차 사라진 뒤. 인간이 기억했던 지구의 삶이 끝난 뒤에도 생명은 다시 움틀 수 있을까요?” 오묘초는 인간 문명이 사그라진 미래의 폐허에서 새롭게 태어날 존재에 관하여 묻는다. 최근의 연작 ‘딱 걸린 진화의 현장’(2024)은 바로 그 가상적 존재들의 태동을 포착한 결과물이다. 자연의 흙을 빚어 만든 투박한 형상을 알루미늄과 유리 등 정제된 광물로 주조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해당 연작이 송은에서 이달 22일까지 진행되는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선보인다. 2층 전시장 동선 초입의 벽면에 설치된 조각은 은빛 나뭇가지 아래 거대한 거미줄이 매달린 형태를 띤다. 알루미늄과 은을 제련하여 만든 지지체에 서지컬 체인과 유리 조각을 조합하여 만든 그물을 늘어뜨려서 완성한 작품이다. 연결과 매개의 상징인 거미줄의 가느다란 투명함은 주위 환경에 용해되듯 어우러지는 동시에, 정교하게 반사된 광원의 반짝임을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감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 곁의 바닥면을 차지하고 선 조각은 기이하게 생장한 식물이나 공상과학 속 외계동물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옹이 부분을 살려 도톰하게 재단한 나무의 단면을 지지대 삼아 수직 방향으로 솟아오른 금속 뼈대는 내장과 같은 은빛 덩어리들을 주렁주렁 매단 모양새다. 중심 기둥의 상단부로부터 호를 그리며 가파르게 하강하는 세 개의 가지가 응축된 끝점으로 바닥을 짚고 선 가운데, 한 쌍의 이지러진 유리 구는 그 뼈와 살을 제 안에 품어 투명하고도 단단한 부피를 이루어낸다. 유리의 숨 안에 갇힌 은빛 구조로부터 이름 모를 유기체의 몸을 상상하여 본다.

‘딱 걸린 진화의 현장’은 인간에 의하여 파괴된 세상 너머 디스토피아에 관한 긍정적 공상을 드러낸다. 신비로운 복잡성과 우연성으로 점철된 자연의 순환체계 내에서 인간과 비인간, 유기물과 무기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풍경을 빚어냄으로써다. “제 작업의 주요 소재인 유리는 시간을 머금고 흐르고, 금속은 불 속에서 녹았다가 다시 굳습니다. 그 변형의 과정에서 저는 기억과 감각을 물질로 옮깁니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다시 태어날 생명과 의식. 저는 조각을 통해 그것들을 형상화하고자 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 그것은 더 깊고 조용한 서사의 시작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지구상 또 다른 생명체의 번영을 위한 비움이 되어줄 터이기에 그렇다.

오묘초의 ‘딱 걸린 진화의 현장’(2024) 연작. ‘제24회 송은미술대상’ 전시 전경.

오묘초는 2016년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 순수미술과를 졸업했다. 2019년 N/A에서 선보인 첫 개인전 이후 테미예술창작센터(2021), 수림큐브(2023), 부암아트(2024)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2020년에는 수림미술상 대상을 수상했고, 2024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아트바젤의 ‘스테이트먼츠’ 섹터에 개인전 부스를 마련하여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송은(서울), 울산시립미술관(울산), 아르코미술관(서울), 메종드겔랑(파리), 세화미술관(서울) 등이 연 단체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올해 한남동 소재 파운드리 서울과 이탈리아 밀라노의 바탈리아 아트 파운드리, 일본 히로시마에 위치한 시모세미술관 등 국내외 기관의 전시 참여를 계획하고 있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세이마이네임 히토미 '사랑스러워'
  • 세이마이네임 히토미 '사랑스러워'
  • 있지 예지 '완벽한 미모'
  • 아이유 ‘사랑스러운 매력’
  • 영파씨 지아나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