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경계 넘어 다양성 중요
중도 소구한 후보 승리해야
신뢰 회복·정치 안정에 기여
“김 과장이랑 최 대리가 ‘그쪽’이더라고? 그렇게 안 봤는데 어처구니가 없네.”
얼마 전 회사 주변 식당에서 옆자리 손님 둘이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정선거 주장에 동조하고, 탄핵에 반대하는 동료를 두고 하는 ‘뒷담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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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기저기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설 명절에 계엄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이 부지기수다. 탄핵 찬반을 둘러싸고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은 일상의 스트레스로 자리 잡았다.
세계일보가 창간 36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도 우리 사회 양극화의 민낯이 드러났다.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8명가량이 한국 정치 상황이 ‘매우 양극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야말로 ‘심리적 내전’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마무리 짓고, 내달이면 결론을 내린다. 더불어민주당은 조기 대선 모드에 돌입했고, 국민의힘 잠룡들은 물밑에서 분주하다.
극단의 시대임을 입증하듯, 진영 결집은 최대치다. 계엄으로 벼랑 끝에 몰린 보수층의 결집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래서일까. 12·3 비상계엄에도 보수 진영의 여론조사 수치는 우상향했다. 일시적일 것 같았던 강경 보수 이미지의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지지율도 두 달 가까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민의힘 기류도 핵심 우파 지지층 결집 방향이 우세하다. 당 지도부는 헌법재판소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편향성을 문제 삼으며 ‘집토끼’를 다독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수도권 중심으로 중도 확장론이 나오지만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며 애써 무시하고 있다.
여당의 우경화 틈새를 민주당은 빛의 속도로 파고들고 있다. 최근 이재명 대표는 감세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고, 당내 논란까지 자초하며 ‘중도 보수’라는 낯선 깃발을 흔들고 있다. ‘오락가락 정치 쇼’라는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양극화된 정치 지형 속에서 운동장을 최대한 넓게 쓰겠다는 전략이다.
여론은 일단 민주당 전략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20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95% 신뢰 수준, 표본 오차 ±3.1%포인트) 결과, 중도층의 기류가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조사와 비교할 때 중도층 지지율을 보면 민주당은 5%포인트 상승(37%→42%)했고, 국민의힘은 10%포인트 하락(32%→22%)했다.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에 당혹스러운 여권은 민주당 이 대표를 겨냥해 총공세에 나섰다. 여권 잠룡들도 연일 이 대표의 정책과 발언을 비판하며 조기 대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고려해 ‘조기 대선’ 언급을 자제하는 대신, 중도층 내에서 자리 잡은 이 대표에 대한 반감을 파고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때리기’ 전략만으로는 중도 표심을 얻기에 역부족이다.
이 시점에서는 여야 모두에게 독일의 정치학자 오토 키르히하이머가 제시한 ‘캐치올 파티(Catch-all party)’ 전략이 유효하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아우르는 정당 모델을 통해 중도층을 잡아야 한다.
1987년 이후 직선으로 치러진 역대 대선을 보면, 중도층은 야구 경기에서 결정적인 순간 등장하는 ‘클러치 히터’처럼 승부를 좌우하는 쐐기포를 날리곤 했다. 박빙 승부였던 16대 대선에서 막판 극적 단일화로 중도층의 표심이 쏠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48.9%)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46.6%)에게 신승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 정치의 체질 개선을 위해서도 중도층이 압도적으로 선택한 후보가 집권하는 게 맞다. 중도층은 정권을 잡은 세력이 권위주의적 모습을 보이거나 극단적 포퓰리즘에 기울면 반드시 채찍을 든다. 거꾸로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정책을 펼치면 당근을 내주는 게 그들이다. 지금이야말로 중도층이 ‘침묵하는 다수’로서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판단과 참여를 통해 정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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