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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 복장으로 주한 중국대사관과 경찰서에 난입했다 구속된 안모씨는 그간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누볐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미군 예비역으로 트럼프 1기 정부 중앙정보국(CIA) 블랙(잠입) 요원으로 근무했다고 소개했다고 한다. 구속 수사 중인 경찰은 지난 24일 안씨는 미 국적이 아니며, 한국 육군 병장 제대 사실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미국에 입국한 기록조차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취재원임을 자처한 ‘중국 간첩 99명 체포설’ 보도는 윤 대통령 측의 ‘부정선거 의혹’ 주장에까지 언급됐다. 사칭 소동 정도로 웃어넘길 일은 아닐 성싶다.
윤 대통령이 지시했다는 ‘체포 명단’ 메모를 작성한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진짜 블랙 요원 출신이다. 육사에서 1990년대 초반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로 옮긴 뒤 수십년간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는데, 탄핵 국면 들어 ‘북한이 심어놓은 빨갱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얼마 전 홍 전 차장은 “40년 동안 빨갱이 때려잡는 게 제가 했던 일”이라고 반박했다.
국정원에서 약 30년 일하고 퇴직한 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의 저서 ‘정보기관의 스파이들’을 보면 해외 공작원은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는 화이트와 신분을 위장한 블랙으로 나뉜다. ‘흑색’, ‘까마귀’로도 불리는 블랙 요원은 민간회사 등의 협조를 얻어 직원이나 지사장 등으로 위장 신분을 얻는다. 여행사나 식당 등 공작 목표에 접근하기 좋은 사업체를 세우기도 한다. 주로 북한이나 제3국에 휴민트(인적정보), 즉 간첩을 심어 첩보를 수집한다. 보안 탓에 귀국은 어렵고 전화나 이메일도 거의 쓰지 못한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 중앙 현관에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검은색 바탕에 은빛별이 붙어있고, 그 밑에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은빛별의 개수는 순직한 요원의 숫자를 뜻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안보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총성 없는 전쟁’을 수행해 온 이들은 마땅히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국익을 위해 산화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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