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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현지시간) 파국으로 끝난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공개 석상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자신이 만든 종전 협상안을 거부하는 젤렌스키를 향해 “무례하다”고 면박을 주고 “(종전 협상안을) 수용 안 하면 우린 손 뗀다”고 으름장을 놨다. 젤렌스키는 ‘안전 보장’을 호소했지만 트럼프는 거부했다. 젤렌스키는 굴욕적인 종전안 수용이냐, 항전 후 패배냐의 갈림길에 섰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와 국민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다. 딴 나라 얘기로 흘려넘기기엔 우리가 처한 안보 환경도 녹록지 않다.
이번 회담을 지켜보며 러시아뿐 아니라 북한도 웃고 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하노이 노딜’ 회담 이후 핵·미사일에 더 집착하다 국제 사회의 거미줄 제재가 가해지면서 곤경에 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을 계기로 김정은은 군대와 포탄을 앞세워 러시아의 지원이라는 구명줄을 잡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 러시아를 편들고 있으니 운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문구가 빠진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정부는 유엔과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대북 제재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트럼프의 거래 외교는 정평이 나 있지만 이번 회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맹·우방국과 손잡고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사라졌음을 파격적 방식으로 드러내 보였다. ‘불량 국가’들이 국제 규범을 위반할 때마다 ‘세계의 경찰’로 나섰던 미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번 회담 직후 유럽에선 “우리는 이제 러시아, 중국, 미국이라는 세 개의 비자유주의 초강대국을 갖게 됐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유럽 정상들은 미국이 빠진 유럽의 자력 안보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동맹’, ‘가치 외교’에만 기대서는 국익을 지킬 수 없다. 한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견제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다. 주한미군 주둔이 미국에도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조만간 방한하는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 ‘안보 청구서’를 들고 올 수 있다. 미국이 원하는 조선과 방산 분야 협력, 미국산 무기 구매 실적 등을 지렛대 삼아 합리적 해결책을 도출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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