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상황설명 수차례… 신변보호도 말뿐 # “엄마 다녀올게요.” 아침 출근 인사가 23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큰딸 유언이 되어 버렸다. 슬픔을 이겨내기도 전에 딸에 대한 ‘이상한 소문’으로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아무리 호소해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당시 충격으로 원형탈모증까지 생긴 어머니 유미자(50)씨는 아직도 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한 에너지 공기업에 다니던 딸은 2005년 5월30일 같은 회사 상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부남이었던 상사는 그날 야근 후 퇴근하는 딸을 자신의 승용차에 억지로 태웠고 무참히 살해, 시신을 야산에 버렸다.
수사를 맡은 경찰은 딸을 직장 상사의 내연녀로 단정해 언론에 자료를 배포했다. 언론은 정말 그런지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이를 기사화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순식간에 ‘살인자의 내연녀’로 둔갑했고 ‘치정 살인’이 돼 버렸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책임이 있는 회사는 딸의 죽음에 대해 단 한 번도 정중하게 사과하거나 애도하지 않았다. 유씨는 지난 10월 언론보도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보호하는 단체인 언론인권센터에서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눈물로 증언했다.
범죄피해자는 두 번 운다. 한 번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또 한 번은 끝나지 않은 범죄의 후유증 때문에.
범죄가 발생했을 때 수사기관은 범인 검거에 주력하는 나머지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둔감하기 쉽고, 심지어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피해자는 법정의 변방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 주체이자 중요 당사자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하다. 대부분 범죄피해자는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뿐 아니라 사건 이후 생계곤란, 주변의 오해, 언론의 오보 등으로 2차, 3차 피해를 입는다. 최근 피해자 인권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범죄 후유증에 시달리는 피해자는 수없이 많다.
◆끝나지 않은 고통=중학생인 소희(가명)는 요즘도 지난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동년배 남학생 여러 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소희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특정 신체 부위와 구체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야 했다. 아무리 범인을 잡기 위한 과정이라지만 범죄피해자를 고려하지 않은 수사 방식에 소희는 화가 치밀었다.
2006년 3월 김모씨는 애지중지 키워온 네 딸 중 두 딸을 잃었다. 연쇄살인범이 집에 침입해 큰 딸과 작은 딸을 죽였고, 이 과정에서 셋째딸은 두개골 함몰과 함께 화상을 입었다. 김씨는 셋째딸과 충격을 받은 부인 병원비로 한 달에 수십만 원씩 지출해야 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직장을 그만둔 김씨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데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지고 있던 집도 팔리지 않았다. 게다가 세입자들 등쌀에 전세금까지 내줘야 했다. 범죄 피해 회복을 위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김씨는 지금도 생활고에 허덕이며 지낸다.
범죄피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인 보복 범죄도 이들을 옥죄는 사슬이다. 2004년 109건, 2005년 123건으로 증가세를 보이던 보복 범죄는 2006년 88건으로 줄어들었다가 지난해 다시 147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8월 현재 109건이 접수된 상태다. 보복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신변보호 제도가 있지만 범죄피해자들은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범죄피해자들은 범죄를 당하면 공황상태에 휩싸여 2차, 3차 피해를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범죄의 진실을 밝히려는 과정에서 보복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언론보도 피해도 잇따라=회사원 김모(33)씨는 지난해 교제하던 여자친구가 자신과 헤어진 후 유서를 남겨 놓고 자살한 사건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인터넷상에서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폭행을 가했다”는 등 수많은 비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신문에 ‘네티즌을 들끓게 한 나쁜 남자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게 문제였다. 김씨는 전혀 그런 적이 없음에도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지는 바람에 정신적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치정에 얽힌 범죄’, ‘불륜관계에 의한 살인’, ‘마약복용 가능성’ 등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이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해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경우도 많다.
언론인권센터 관계자는 “언론보도로 인권 침해를 당했다고 판단되면 즉각 중재신청을 하거나 적절한 형사·민사적 구제방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특별기획취재팀=염호상(팀장)·박성준·조민중·양원보·송원영 기자
〈용어설명〉
◆범죄피해자=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로 당사자의 배우자(사실상 혼인관계 포함), 직계 친족 및 형제자매, 범죄 피해 방지 및 범죄피해자 구조활동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 등이 포함된다.
◆범죄피해자구조금=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를 해하는 범죄행위로 인해 사망한 자의 유족이나 중장해를 당한 자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돈으로, 유족에게는 1000만원, 중장해의 경우 장애등급(1∼3급)에 따라 300만∼600만원이 지급된다.
◆범죄피해자=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로 당사자의 배우자(사실상 혼인관계 포함), 직계 친족 및 형제자매, 범죄 피해 방지 및 범죄피해자 구조활동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 등이 포함된다.
◆범죄피해자구조금=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를 해하는 범죄행위로 인해 사망한 자의 유족이나 중장해를 당한 자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돈으로, 유족에게는 1000만원, 중장해의 경우 장애등급(1∼3급)에 따라 300만∼600만원이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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