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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하게 오래 살다가 갑자기 죽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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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2-27 22:00:27 수정 : 2011-02-27 2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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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일본의 ‘세상과 잘 이별하기’
90대 부모 “자녀들 60대인데 폐 끼칠 수야…”
‘어느날 갑자기 심장 마비’가 이상적 죽음
최근 일본에서 건강과 장수, 장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기를 바란다’는 뜻의 ‘핀핀코로리’(약칭 핀코로) 또는 이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PPK’가 새로운 생사관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의식해 거품이 잔뜩 낀 장례문화도 대폭 간소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23%를 넘어선 초고령사회 일본의 깊은 고민이 배어 있다.

일본 나가노(長野)현 사쿠(佐久)시는 수년 전만 해도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던 곳이다. 타 지역에 비해 딱히 내세울 만한 명승지나 특산물, 온천시설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인구 10만명의 이 작은 도시에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아들면서 전에 없이 활기가 넘치고 있다.

이 지역의 ‘나리타산 야쿠시지(成田山藥師寺)’라는 사찰 내에 세워진 신장 1m가량의 지장보살상이 ‘핀코로’의 소원을 이뤄주는 신통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연간 5만여명이 핀코로를 기원하기 위해 이 사찰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 앞 상점가 주인들이 “우리 지역도 한번 관광명소를 만들어보자”며 2003년 10월 핀코로를 이뤄주는 지장보살상을 세운 것이 일본 사회의 고령화 흐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 상인들로 구성된 ‘핀코로회’는 ‘핀코로 지장보살상’ 상표등록까지 마치고 휴대전화 고리와 찻잔, 가방, 젓가락, 방석 등 다양한 기념상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곳 외에도 일본에는 인기 있는 핀코로 기원지가 몇 곳 더 있다. 요코하마(橫濱)시의 후쿠센지(福泉寺), 나라(奈良)현의 기치덴지(吉田寺), 같은 현 미토(水戶)시의 가쓰라기시지(桂岸寺), 후쿠시마(福島)현의 ‘고로리 삼관음’, 구마모토(熊本)현의 샤카인(釋迦院) 등도 신통한 ‘핀코로 기원지’로 알려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여행사들은 이런 수요에 호응해 핀코로 기원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내놓고 있다.

핀코로 기원 장소를 찾는 일본인들은 그 이유에 대해 대부분 오랜 병치레로 자녀나 다른 가족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아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친구와 함께 요코하마의 후쿠센지를 찾은 한 주부(62)는 언론 인터뷰에서 “94세의 모친과 같이 살고 있다”면서 “노인이 노인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살다가 별안간 세상을 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달라진 일본인들의 생사관은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오사카(大阪)시의 재단법인 ‘일본호스피스·완화케어 연구진흥재단’이 2008년 전국의 성인 남녀 982명에게 ‘이상적인 죽음의 형태’를 물었더니 ‘심장병 등의 돌연사’라는 응답이 726명(73.9%)으로 가장 많았다. 복수응답으로 그 이유를 묻자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576명, ‘괴로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500명), ‘와병 생활이라면 살아있어도 의미가 없다’(342명) 순으로 나타났다.

앞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가 2007년 일본의 40∼70대 남녀 735명을 대상으로 비슷한 조사를 벌였을 때도 응답자의 75.9%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병 등으로 죽고 싶다’고 답했다.  

◇일본인 관광객이 나가노현의 사찰 나리타산야쿠시지(成田山藥師寺)에서 핀고로 지장보살상 앞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게 해달라’고 빌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핀코로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일본 서점가의 건강코너에 가면 ‘핀핀코로리 방법’ ‘핀핀코로리, 기분좋게 살고 갑자기 죽기 위해’ ‘핀핀코로리의 법칙’ ‘핀핀코로리의 7가지 비결’ ‘핀핀코로리 달인’ 등 핀코로와 관련된 건강 지침서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은 물론이고 30∼40대 남녀 직장인들까지 노후 대비의 한 과정으로 핀코로를 위한 라이프스타일과 식생활, 운동 방식을 터득하기를 원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열심히 살아도 부족한 판에 죽음의 방식에 대해 떠드는 일본의 핀코로 붐이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일본 사회 내부적으로는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다. 일본의 사회보장 연금제도는 10년 전만 해도 현재 직장을 갖고 일하는 현역 세대 10명이 은퇴한 노인 1명을 부양했지만 최근에는 3명이 1명을 먹여 살리는 구조다. 2020년 이후에는 사정이 더욱 악화돼 현역 세대 2명이 노인 1명을 떠받쳐야 한다. 지금도 부모가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오래 투병생활하면서 자식들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연이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타고 있다.

공적 사회보장과 연금 제도가 비교적 튼튼한 북유럽 국가와 달리 일본 정부는 1000조엔에 달하는 천문학적 국가부채를 떠안고 있다. 이 때문에 노후생활은 결국 국민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인식이 일본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건강하게 살다가 별안간 죽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조차 큰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불안이 일본의 핀코로 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도쿄=김동진 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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