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 타운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아프리카의 땅끝 희망봉, 원숭이와 타조 등이 자유로이 노니는 자연보호구역, 물개섬, 산 정상이 식탁처럼 평평한 테이블 마운틴 등등. 이런 볼거리를 찾아 1년에 300만이 넘는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
빅토리아-알프레드 선착장 주변은 활기가 넘쳤다. 식당과 바,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고 오가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트럼펫 연주와 함께 춤을 선보이는 거리의 악단도 보인다. 취재진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30분만에 로빈 아일랜드에 내렸다.
로빈 아일랜드. 케이프타운에서 11㎞ 떨어진 이 섬은 폭 2㎞, 길이 4㎞의 길쭉한 돌섬이다. 원래 이곳은 물개나 바다표범 펭귄떼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진출한 뒤 1658년부터 암흑의 섬으로 바뀌었다. 제국주의 식민정책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유형지가 된 것이다. 19세기 들어 영국인이 이 지역을 차지한 뒤에는 한때 정신질환자나 나병환자를 격리하는 수용소로 쓰이다 다시 정치범형무소가 됐다. 이곳에 수감된 정치범 가운데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도 ANC 간부들과 함께 파업투쟁을 이끌며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이곳에 왔다. 그는 27년의 감옥생활 가운데 18년을 로빈 아일랜드에서 보냈다. 오늘날 이 섬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흑인차별의 실상을 증거하는 박물관이 돼 있다.
안내인은 "이곳 가이드 가운데는 과거 여기서 감옥생활을 겪은 이도 여럿 있다"며 "직접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생생한 체험담을 들을 수 있다"고 소개한다.
예전 남아공의 ''아파르트하이트(흑인차별 정책)''는 유별났다. 죄수가 ''백인''이냐 ''유색인'' 또는 ''반투인(흑인)''이냐에 따라 감옥에서도 빵과 고기, 소금의 양에까지 차등을 둘 정도였다. 인도인이나 유색인 죄수에게는 설탕 한 숟갈과 빵 한 덩어리가 주어졌지만 흑인들에게는 설탕 반 숟갈에 멀건 야채죽이나 옥수수죽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특별한 날에 고기 한 조각이나 채소가 지급됐다. 죄수 가운데서도 정치범은 최악의 대우를 받았다. 감옥에서나마 흑백 차별 없는 표준식단이 마련된 것은 1979년부터였다고 한다.
로빈 아일랜드의 죄수들은 거의 흑인이었고 간수 등 관리자는 모두 백인이었다. 죄수들은 이른 아침이면 비위생적인 변기통으로 찬물을 받아다가 세수를 했다. 낮에는 섬 한가운데 있는 채석장에 동원돼 일을 했다. 두 사람씩 발목을 쇠줄로 묶인 채 뙤약볕 아래에서 대리석을 캐거나 돌을 깨고 이를 트럭 위에 실어나르곤 했다.
26년간 감옥살이를 한 엔드루 음란게티는 훗날 "무더위 속에서 돌 깨는 일을 하다 눈을 다친 사람이 많았다"며 "어떤 때는 하루에 일륜차 10대 분량씩 채워야 했는데 책임량을 해내지 못하면 교도관들이 며칠씩 굶기곤 했다"고 회고했다.
감방은 대개 가로 세로 2×2m쯤 되는 공간. 죄수에게는 매트 한장과 담요 두장, 변기통 겸 물통이 주어졌다.
감방마다 한쪽 벽에는 이곳을 거쳐간 죄수들의 증언이 써붙여져 있다.
"''다음은 저놈일 거야'' ''아냐 저놈이 확실해''-이런 말을 그(백인 교도관)들은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소나 말같은 짐승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놓고 내기를 걸었고 이를 즐겼다. 의사는 ''이 놈은 이빨이 좋고 엉덩이가 괜찮아. 죽는 날 가져갈 수 있을 거야''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노동자들의 사보타지를 모의한 혐의로 10년간 복역한 인드레 나이도는 이런 증언을 했다.
"교도관들은 종종 모래밭 구덩이에 죄수들을 파묻은 뒤 목만 내놓게 했다. 그리고는 뙤약볕 아래 한나절씩 서있게 했다. 물을 청하면 교도관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그 안에 대고 오줌을 눴다. 그게 최고로 맛좋은 위스키라면서…."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이다. 더러 사람좋은 백인 교도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는 이처럼 악랄했던 모양이다.
백인통치에 항거한 주요 정치범들은 다른 흑인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일과 뒤 감방 점호가 끝나고 교도관이 돌아가면 이방 저방 죄수들은 벽을 두들겨 가며 신호를 보내고 굶주렸던 그들만의 대화를 나눴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감옥 속에서 그들은 고향과 가족, 해방의 날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장 즐겨 부른 것은 ''자유의 노래''였다.
"티나 시즈웨, 티나 시즈웨, 이신순드…"
줄루 말로 된 이 노래를 한 두명이 먼저 부르기 시작하면 곧 우렁찬 합창이 되곤 했다. 노랫말은 이런 뜻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갈색의 나라. 우린 우리 땅을 원해요. 백인들이 빼앗아간 우리 땅을. 우린 아프리카의 후예들! 우린 우리 땅을 원해요. 그들은 이 땅을 떠나야 해요.…"
백인 정부의 아파르트하이트는 ''아프리카 영웅들''에게 죄수의 낙인을 찍고 그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꿈과 신념까지 묶어둘 수는 없었다. 로빈 아일랜드의 안팎에서 인종차별 정책에 항거하는 흑인들의 외침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전체 인구의 10%밖에 안되는 백인들이 절대다수인 흑인 위에 군림한 채 온갖 이권을 독점하며 자행한 탄압과 규제의 사슬은 필경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정치범들을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로부터 4년 뒤 흑인들은 마침내 소수 백인정권을 밀어내고 넬슨 만델라 정권을 탄생시켰다. 쓰러졌던 자는 일어섰고 짓밟은 자는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없는 무혈의 선거혁명이었다.
로빈 아일랜드에 갇혔던 정치범 수백명이 복권됐고 최근까지 그 상당수가 남아공 정부와 의회 주정부 등에서 일해 왔다. 로빈 아일랜드는 이제 세계 사람들에게 피부색을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일깨우는 성지로 기억되고 있다.
/차준영기자 jycha@sgt.co.kr
<사진>로빈 아일랜드의 안내인이 박물관 입구에서 흑인 정치범 형무소였던 이곳의 역사를 관광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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