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순간들에 영원의 숨결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아레초(Arezzo)가 나오는 장면들을 나는 참 좋아했다. 줄거리나 배우의 연기에서 나오는 분위기보다 풍경과 도시에서 오는 느낌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극적인 장면이든 다른 어떤 장면이든 배경 자체가 순간순간 보여주던 그 아름다움, 소박함과 명랑함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현실, 아레초에 와서 깨달았다. 그것은 영화라기보다는 아레초, 그 자체였다는 것을….
피렌체의 유명세에 가려 아직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꼽힌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확 트인 대자연의 풍경, 토스카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이 아름답고 작은 도시들 사이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아레초를 찾을 수 있다.
보석산업으로 토스카나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인 아레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가 사랑을 만나 가정을 이루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영화 속 배경이라는 정보만으로 아레초로 향했고,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아레초에 발길이 닿았다. 마치 좁은 기찻길을 지나자 어느 순간 거대한 토스카나 평원이 예고 없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아레초. 관광객에 익숙지 않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관광 인포메이션 센터도 문을 닫았고, 가이드 북에도 별 정보가 없어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봤던 낯익은 장소들이 시선을 붙잡았다. 비 오는 날 도라를 위해 귀도가 카펫을 굴려 깔아주던 계단, 둘이서 비를 피하던 곳,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먹던 곳, 아들 조수에와 다니던 길들…. 정말로 골목 어디선가 귀도와 조수에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가 나와 부딪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레초의 길은 참 특이했다. 큰 길은 별로 없고 길 하나에 가지 치듯이 골목이 많다. 골목들끼리 이리저리 얽혀 있어 제각기 특색이 있다. ‘어디에 뭐가 있을까’ 하는 설렘으로 골목들에 다녀보는 것도 참 즐겁다.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피아차 그란데에 도착하게 된다. 영화에서도 가장 빈번히 나오는 곳이고, 실제 아레초에서도 중심이 되는 광장이다. 보통 이탈리아의 도시들에는 중심을 이루는 광장이 하나씩 있는데, 다른 도시들과 달리 아레초의 광장은 ‘그란데(Grande)’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규모가 상당히 작다. 이곳에서 매달 첫째주 토요일에 열리는 골동품 시장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정평이 나 있다. 아침 일찍 찾는다면 맘에 쏙 드는 기념품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레초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프레스코화 ‘참된 십자가의 전설(Leggenda della vera croce)’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프레스코 연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어린 나무에서 자라 십자가가 되고, 이것을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찾아 가져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일요일이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어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일부러 발품을 팔아서라도 꼭 볼 만한 작품이다.
아레초는 평지부터 시작해서 완만한 오르막길이 높은 언덕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피아차 그란데를 지나 도시의 맨 위까지 올라가 보니 오래된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안고 있었다. 성벽 밖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런 장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의 주인공 귀도가 살던 도시 아레초는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베니니 감독은 고향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했기에 영화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이곳에서 작은 행복과 즐거움을 찾아낸 것 같다. 여행을 하며 아름다운 도시들을 많이 거쳤지만 지금도 아레초는 내 기억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 중 하나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하다 ‘아레초’라고 써 있는 역이 보이면 다시 한번 기차에서 내릴 것이다. 망설임 없이 즐거워질 준비를 단단히 한 채….
이원진·배낭여행 커뮤니티 ‘떠나볼까’
(www.prettynim.com) 회원
■여행정보=기차로 피렌체에서 1시간, 로마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내려서 출구로 나오면 아레초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이 곧장 있다. 피아차 귀도 모나코(piazza guido monaco)를 찾으면 된다. 인포메이션센터는 역에서 나오자마자 오른쪽에 있지만 일요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산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성당 앞에도 인포메이션센터가 있는데 이곳은 일요일에도 문을 연다. |
아레초에는 코인 라커를 비롯한 짐 맡기는 곳이 없어 짐을 가지고 여행하기는 조금 힘들다. 피렌체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오는 편이 낫다. 도시가 크지 않기 때문에 4∼5시간 정도 잡고 오면 웬만큼 돌아볼 수 있다. 적당히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지만, 역 건너편의 ‘젤라테이아’에서 파르페와 샌드위치를 곁들여 가볍게 배를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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