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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② 조선시대 과거시험 열기 속으로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입력 : 2008-01-10 14:37:00 수정 : 2008-01-10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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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3년에 고작 33명 뽑아… 관리되기 ‘별따기’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시험을 칠 때면 대한민국 사회는 한바탕 큰 홍역을 치른다. 고3 학부모 대부분은 자녀의 대입을 위해 사생활을 1년간 저당잡힌 채 수능에 모든 것을 건다. 때맞춰 방송이나 신문은 수능 열기를 보도하고, 수능 시험의 정답 풀이까지 정규 방송에 편성할 정도이다. 국토와 자원이 한정된 지리적 여건, 인재와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전통 등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시험이라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과연 우리보다 전 세대를 살았던 조선시대 사람들도 우리처럼 시험의 열기에 빠져들었을까?


#1. 과거길, 관광길

우리는 TV나 책 속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향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접한다. 그런데 과거시험의 구체적인 과정과 시험 과목 등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험으로는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가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하여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생을 걸었다. 과거시험에는 관리를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율관·역관·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문과(대과라고도 함)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에서 뽑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진사시는 문장력을 알아보는 시험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시험에 해당한다. 고전소설에서 ‘최진사’, ‘허생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과거 합격자에게 국왕이 내렸던 합격증(홍패)과 어사화.

오늘날 논술고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진사시 이외에 본 시험인 문과에서 책문(策文)이라 하여 주제에 맞는 문장 작성 능력을 비중 있게 평가했다. 그런데 문장 시험에서는 종종 직접 생각해낸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조대의 학자 신흠은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기존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거의 반수가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생원시와 진사시, 둘을 합쳐서 소과라 했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서는 출석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이 되어야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해 성실성을 과거 응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의 내신 성적과 유사한 셈이다.

문과 역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총 33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식년시가 3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니 3년에 33명의 관리가 뽑혔다. 조선시대 공무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에는 과거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간다’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 여행을 의미하는 관광길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 흥미롭다.


#2. 지역별 쿼터제가 실시된 과거시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소과와 문과의 초시에 지역별 인구비례로 인원을 선발한 ‘지역별 쿼터제’가 적용됐다.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문과 초시 합격자의 도별 정원을 규정해 놓았는데, 성균관(50명), 한성부(40명), 경기(20명), 충청도·전라도(각 25명), 경상도(30명), 강원도·평안도(각 15명), 황해도·영안도(각 10명) 등이었다. 초시에서는 지역별 인구비례로 인원 안배를 한 뒤 복시(覆試)에서는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았다. 이를 통해 지역적 격차를 해소함과 동시에 개인의 능력을 적절히 반영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했으며, 함께 합격한 사람은 동기생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가 많고 적어도 친구처럼 지냈고, 따로 계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합격자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삼일 동안의 휴가)를 줬으며, 합격자를 배출한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 후기에는 ‘평생도’라 하여 자신 일생의 주요 장면을 8폭의 병풍에 담아 집에 보관하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과거 합격 장면이었다. 그만큼 과거시험 합격은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됐다. 

◇문과 응시생이 거쳐야 했던 소과 시험장의 모습. 마치 관광하듯 자유롭게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이채롭다.(왼쪽)

◇단원 김홍도가 그린 ‘모당평생도’ 중 과거에 합격한 뒤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사흘 동안 친척과 선배 급제자, 시험관 등을 방문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

#3. 뇌물 받은 이의 자손 영원히 응시자격 박탈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양인 신분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노비 등 천인들에게는 응시자격을 제한했다. 제도상으로는 농민 출신이라도 열심히 공부만 하면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농사일에 종사하는 농민이 시험에 합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양인 신분 이상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즉 역모죄를 범한 죄인의 아들이나 장리(贓吏·뇌물을 받은 관리)의 자손, 재가(再嫁)한 여자의 아들과 자손, 그리고 서얼은 과거의 응시가 불가능했다.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과거시험에 나가지 못한 것은 이러한 제한 규정 때문이다. 뇌물 받은 자손의 과거 금지를 규정한 것은 지금보다도 뇌물에 훨씬 엄격한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노비는 원칙적으로 과거 응시가 제한됐지만, 주인에게 배운 학문을 통해 몰래 과거에 합격한 경우가 간혹 있었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潘碩枰)은 재상집 가노(家奴)로서 문과에 급제했는데 조선시대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4. 과거시험장의 부정행위 백태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를 통해 성적을 올리려는 생각은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못지않았다. 과거 시험장은 대개 2∼3곳에서 치러졌으며 시험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은 상피(相避)라 하여 다른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다. 시험장에서 거자(擧子·수험생)들은 각각 6자(약 1.8m)씩의 거리를 두었으며, 시험장에서는 거자 이외의 출입은 금지됐다. 거자들은 시험장 앞에서 필기도구 이외의 책이나 쪽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받았으며,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쟁탈전도 불사했다.

시험장 내에서는 갖가지 부정행위도 속출했다.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역시 오늘날 컨닝에 해당하는 것이다. 긴 도포자락에 빼곡히 예상 답안을 써온 사람, 담장 주변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하인을 시켜 종이쪽지를 건네받는 사람, 붓뚜껑에 답안을 숨긴 사람, 심지어는 콧구멍에 답안을 숨겼다가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이외에 차술(借述)이라 하여 남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경우도 있었으며, 시험관을 뇌물로 매수하거나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요즈음의 학교장 추천제나 기여입학제 문제도 종종 불거졌다. 과거제도가 지나치게 시험성적에만 의존하고 유력한 집안의 자손에게 유리하다 하여 천거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시로 있어 왔다. 그러나 기본 방향은 시험성적, 즉 실력에 의한 인재 등용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과거는 비록 제도 문란과 늘어가는 합격자 수로 회의적인 의견이 다수 제기됐지만, 조선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이 땅을 살아간 선비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최고의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숙명처럼 다가오는 시험에 대한 공포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공포뒤의 희망이 있기에 먼 미래에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험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계속)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부정행위 방지 어떻게

조선시대에도 시험이 한 인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평가수단이었던 만큼 부정행위 방지를 위한 노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권이라는 시험 답안지의 옆에는 4대조와 외조부의 성명을 쓴 부분이 있었는데, 채점을 할 때는 이 부분을 오려 놓아 답안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했다. 이어 역서(易書)라 하여 글씨만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안지를 옮겨 쓰게 했다. 답안 작성자의 필체를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상피(相避)는 응시자의 친인척은 시험관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었는데, 오늘날 수험생 자녀를 둔 사람은 출제위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배송(背誦)이라 하여 등을 돌리고 유교 경전을 외는 시험에는 천막으로 뒤를 가려 응시자를 몰라보게 하였다. 이 역시 오늘날 음악 같은 실기시험에서 응시자를 모르게 하고 시험을 치는 것과 흡사하다.

컨닝이라도 해서 점수를 얻으려는 응시자와 이를 방지하게 위해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하는 모습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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