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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은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데, 그게 쉽지 않다”면서 시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

정현종(69)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수록된 시집 ‘견딜 수 없네’ 이후 5년 만이다.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43년 동안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물을 소박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도를 한다. 투박함 속에 기교를 감추는 ‘장교어졸(藏巧於拙)’의 경지가 곳곳에 있다.
시집에 수록된 시 60여편은 간결한 옷차림처럼 깔끔하다. 다채로움과 현란함보다는 아름다운 ‘광휘’ 하나에 만족하리라는 시인의 심중이 엿보인다. 시인은 빛 속에서 충만함을 느낀다.
“저녁 어스름 때/ 하루가 끝나가는 저/ 시간의 움직임의/ 광휘,/ 없는 게 없어서/ 쓸쓸함도 씨앗들도/ 따로따로 한 우주인,/ (광휘 중의 광휘인)/ 그 움직임에/ 시가 끼어들 수 있을까.”(‘광휘의 속삭임’에서)
고졸한 멋은 짧은 시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하이쿠를 연상케 하는 시들은 읽는 이의 가슴에 수직으로 꽂힌다.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기 때문이다.
“흙냄새를 맡고 나서/ 침을 삼키니/ 침이/ 달다!”(‘흙냄새2’)
“이삿짐은/ 모든 이삿짐은/ 도무지 거룩하기만 해서/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다.”(‘이삿짐’)
단시들이 형식적인 고졸미를 나타낸다면, 시인의 일상이 노출된 시들은 정서적인 고졸함을 내비친다. 시인은 사립문을 훤히 열어놓는 촌부처럼 소탈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저녁 아홉 시./ 밖에서 저녁 먹고/ 술 한잔 하고/ 돌아오다가/ 하늘을 보니 아, 구름이 빛 덩어리이고/ 또 하늘이 푸르르다, 이 밤에./ 하얀 빛나는 구름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술집으로 간다.”(‘빛 구름이’에서)
정 시인은 꾸밈과 권위를 포기하는 대신 친근한 분위기를 얻는다. 그는 옷깃을 풀고 편안하게 시와 사물 속을 드나든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그의 시에 대해 “애써 시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술술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마치 시 전체가 의미 이전에 하나의 파동이나 숨결처럼 물결쳐 오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사물을 노래하지만, 시를 남발하지는 않는다. 기교를 감춘 고졸미와 밋밋함은 엄연히 다르다. 시를 억지로 쓰려는 사람에게 그는 짧게 일갈한다.
“시를 쓰련다는 야심은/ 그것만으로/ 시를 죽이기에 충분하다는/ 앙리 미쇼의 말씀!/ 시여/ 굶어 죽지도 않는구나.”(‘시 죽이기’)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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