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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 17년간 머문 불일암

입력 : 2010-05-06 17:41:05 수정 : 2010-05-06 17: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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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가난은 넘치는 富보다 훨씬 값진 것”
5월의 산하는 신록과 꽃이 분양되고 무상증자되는 현장이다. 이 현상은 남도에서 유독 강렬하다. 승보종찰 송광사를 찾았다. 송광사는 선원·강원·율원·염불원을 모두 갖춘 종찰이다. 송광사를 찾았지만 산내 암자인 불일암과 그 주변을 둘러봤다는 표현이 나을 듯하다. 불일암은 법정 스님이 17년간 머문 공간이다. 스님의 유골도 안치돼 있다. 불일암은 광원암, 천자암과 함께 송광사의 암자다. 기록에 송광사에는 열여섯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여섯 암자 중 하나이다. 무소유의 큰 가르침을 남기고 떠난 법정 스님의 49재가 열린 뒤여서 어느 때보다 마음가짐을 단정히 했다.

◇스님은 가셨지만, 그 뜻은 온전히 전해지고 기억된다. 불일암 방문객들은 방명록에 스님을 기리는 글을 남긴다.
송광사 매표소 입구의 주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량이 장악하고 있었다. 초파일도 곧 다가오고 법정 스님에 대한 그리움도 간절해서일 것이다.

불일암은 송광사 매표소에서 북서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개울을 끼고 경내로 들어섰다.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교향곡보다 아름답게 들려온다. 벚꽃이 물러난 조계산 자락의 대나무와 편백나무가 지상의 공기와 시간을 모두 푸른 빛깔로 바꿔 놓은 듯했다. 대숲으로 이어진 산책로에서 스님의 맑은 정신을 엿보았다. 산사를 오르내리는 방문객과 등산객의 옷차림이 대숲과 대비돼 도드라져 보였다. 대숲을 지나는 그들 또한 삶을 관조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사각거리는 대숲의 바람소리를 그냥 지나칠 만큼 여유가 없는 이들이 아니었으면 싶다.

물·산새 소리가 마치 교향곡

◇불일암에 들어서려면 대숲 속을 거닐어야 한다. 청아한 스님의 뜻을 받드는 듯, 대숲의 사각거리는 소리마저 푸르게 느껴진다.
이정표가 몇 군데 없어서 오가는 초행자들이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곧잘 묻는다. 홀로 조용히 수행한 스님의 처지에서는 굳이 이정표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편백나무와 대나무, 산죽이 즐비한 산길을 오르면서 새삼 “잘 죽는 게 최고의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이곳 식물들은 속세의 인연들보다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스님의 참된 삶과 높은 뜻이 전해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까. 이 또한 이곳에 존재하는 식물들의 복일 것이다.

불일암 입구도 대숲으로 꾸며져 있다. 대숲 출입구의 아치를 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일암에 들어서니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스님이 35년 전 심었던 후박나무와 해우소도 눈에 들어온다. 아주 작은 암자다. 다른 때 같았으면 조용했을 암자가 스님의 49재가 끝난 5월 초여서 그런지 단체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산속에 있는 암자를 찾는 이들은 대개 조용하고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데, 최근 몇 달 사이 불일암은 관광지처럼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됐다.

스님 49재 끝난 뒤 단체관광객 북적

많은 이들 중에 눈에 띄는 분이 법정 스님의 맏상좌인 덕조 스님이다. 법정 스님이 잠들어 있는 후박나무 주변에 대나무로 나지막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30㎝도 안 되는 높이로 스승의 유골이 뿌려진 주변에 보호용 울타리를 만드는 스님의 손길에 정성이 가득하다. 잠시 기다렸다가 스님과 함께 차를 마셨다. 예정에 없던 물음에 스님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셨던 법정 스님께서 지금 불일암을 보면 어떤 말씀을 할까 걱정됩니다. 조용히 차분하게 이승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인데, 지금 이 많은 관광객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지…. 스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실천하면 되는데, 세상이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네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맏상좌의 고민이 느껴진다. 덕조 스님은 “순천시에서 ‘무소유의 길’을 만든다고 하는데, 스님의 제자인 저와 불일암은 잘 모르는 내용”이라는 말씀도 했다. 그런 인위적인 길은 무소유의 가르침에 어긋날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속세에 거주하는 언론인의 욕심이 발동했다. 스님과 말씀을 끝내고 무소유의 길을 일부 걸어보았다. 그런 점에서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산길은 천천히 걷기에 좋은 길이다.

이곳처럼 다양한 식물분포도를 자랑하는 곳도 없다. 한줄기 땀을 쏟아내고 편백나무 아래에 앉아 생을 곱씹어본다. 산사의 고요함에서 가슴에 일렁이는 장엄함을 건져 올린다. 조계종과 태고종을 품에 안은 조계산의 가슴이 한없이 넓어보인다. 3시간이 조금 넘는 산행에서 스님의 무소유를 되뇌어본다. 

◇법정 스님이 거닐었을 송광사 뒤편의 산책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공덕뿐이라는 사실을 스님은 아셨을 것이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따라가면 개울도 지나고 여러 식물의 향기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 무소유길이 만들어지면 70㎞가 넘는 길이 된다고 했다. 송광사∼불일암, 송광사∼다비식장, 송광사∼고동산∼낙안읍성 민속마을∼정채봉문학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72㎞에 이른다는 것이다.

취재를 끝내고 귀경해 순천시청의 담당 공무원에게 ‘무소유의 길’에 대한 추진 상황을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나왔다. “무소유의 길을 추진할 생각은 있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49재 이전에 불일암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덕조 스님께서 법정 스님의 뜻과 다를 수 있고, 49재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완곡히 반대의 뜻을 표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추진하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소유의 길’ 굳이 만들 필요 있을까

순천시 공무원의 말이 고맙게 들렸다. “법정 스님은 아마 이곳을 홀연히 떠났을 것”이라는 덕조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밀려드는 불일암 관광객에게도 부담을 느꼈을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길’이 만들어진다면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소유의 길을 오롯이 걷고 싶다면 스님이 걸었을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을 걸으면 되지 싶다.

불일암과 산길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주암호 주변을 거닐어 본다. 1980년대 후반 전남 지역의 용수 공급을 위해 완공된 주암호는 이제 송광사와 함께 쌍으로 소개되는 이 지역 명승지다. 산사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를 옆에 두고 고요하게 젖어있는 주암호가 아름답다. 자기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주변에 용수를 공급하는 주암호의 모습은 더 아름답다.

불일암(순천)=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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