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 [파우스트] 1막 1장을 보면 “(신에게 감사하는 합창을 뒤로하고)신이라...그 신이 내게는 뭘 해줄 수 있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페라 [파우스트]에 푹 빠져있던 지난 주 내내 그 질문이 ‘오페라가 나에게 뭘 해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들렸다.
우선, 오페라로 인해 10년 가까이 ‘한번 얼굴 보자’라고 말은 했지만 쉽사리 만남을 성사시키지 못했던 대학원 동기를 만나게 됐다. 반가움도 잠시, 막상 만나자마자 한 말은 “너도 오페라 좋아했어? 의외내”. 그렇게 만나기 어렵던 친구를 순식간에 만나게 해준 오페라의 위력이었다.
아이의 일반 상식이 몰라보게 늘었다. 이번주에는 오페라 ‘파우스트’에 대해 술술 이야기하는 수준이 7세 아이치고는 높다. 딸 아이는 엄마의 공연 관람 스케줄을 하나 하나 물어보는 편인데, 또 ‘파우스트’를 보러 가야 된다고 하니 질문이 떨어진다. “정결한 집(부르는)파우스트 아저씨도 봤고, 금송아지(의 노래 부르는) 악마 할아버지도 봤잖아. 보석(의 노래 부르는)언니 노래도 들었잖아. 왜 또 보러 가?”

이럴 때 엄마는 최대한 아이의 시각에서 답해줘야 한다. “파우스트 아저씨(테너 백윤기)가 한 명이 아니라 두명이야. 이번엔 외국인 악마 할아버지가 아닌 우리나라 악마 아저씨(베이스 박준혁)가 나오거든. 주인공 언니도 이번엔 우리나라 언니(소프라노 문수진)가 출연한대. 똑같은 역할을 다른 사람이 연기하고 노래한다고 하니 궁금하잖아.” 이젠 같이 프로그램 책을 보고 가수들 얼굴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누가 더 잘생기고 예쁘나? 하는 품평회(?)를 하기도 한다. 후일 친숙한 오페라 제목, 가수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오페라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건 시간 문제다.
3시간이 넘는 오페라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기 위해서는 체력을 더 보강해야 한다. 밤 11시가 넘게 계속되는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자정 12시가 넘어 날이 바뀌게 된다. 또한 직업 특성상 한 편의 공연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극장에서 느낀 순간 순간의 감정을 글로 불러 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이 부분이 ‘오페라 공연을 한번 더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한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몸은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 가 있다.
18일 공연된 오페라 [파우스트]를 관람한 결과, 첫날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의 호흡이 약간씩 어긋났던 것과 달리 이번엔 완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애정 있게 지켜본 메피스토 역 베이스 박준혁의 음성은 사무엘 레미에 비해 부드러운 감이 있어 듣기 편했으나 몸 자체가 다소 뻣뻣한 느낌이 든 점은 아쉬웠다. 5막 발프르기스의 밤 장면에서 특히 도드라져 보였는데 전문적으로 무용을 배워 다시 한번 만나면 보다 실감나는 연기를 선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베이스 박준혁은 국립 오페라단의 차후작인 <시몬보카네그라>(4/7~10)에서도 피에르토 역으로 출연해 관객들과 한 차례 더 만날 예정이다.
파우스트 역 테너 백윤기는 외모 자체가 김우경에 비해 날카로워 그런지 목소리와 연기 모두 예민한 파우스트로 느껴졌다. 그 결과 파우스트가 초반 고뇌하는 장면에서 더 공감이 갔다. 마그리트 역 문수진은 손 대면 찌르르 유리에 금이 갈 것 같았던 청순한 알렉시아 불가리두의 느낌과는 다른 분위기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문수진의 목소리 역시 맑고 깨끗했지만 보다 깊은 맛이 있어 듣는 이에 따라 감상평이 달라질 것으로 보였다.

오페의 발성에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뮤지컬 배우들의 가창 실력에 웬만해선 만족 못하게 된다. 게다가 이젠 연극을 보면서도 중간 삽입된 오페라 음악이 들린다. 예전 같으면 별 의미 없이 흘려들었을 음악이다. 일례로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에선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배경 음악으로 살짝 깔린다. 게이 몰리나가 반정부주의자 발렌틴을 유인하기 위해 영화이야기를 하는 장면 초반에 나온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내용을 보면, 호색한 만토바 공작이 리골레토의 딸 질다에게 한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아버지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에게 공작 살해를 요청한다.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질다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이런 '질다'라는 인물과 연극 속 몰리나의 이미지가 오버랩 돼 몰리나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할 수 있게 된다. 연극을 보다 다채롭게 감상하게 되는 건 두말할 필요없다.
◆ 바그너 ‘라인의 황금’에서 러시아 연극 ‘폭풍’을 보다.

황금같은 토요일(19일) 오후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전야제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을 보고왔다. 호암아트홀, 크레디아, ㈜에이치엠엔 이 선보이는 2011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의 첫번째 작품이다. 즉, 영화 화면으로 만나는 오페라 실황 공연이다.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 연출가 로베르 르파쥬의 손길이 닿은 메트의 새 바그너 프로덕션이다.
2005년 9월. 러시아 마린스키 오페라단이 선보인 ‘니벨룽의 반지’ 서울 공연을 챙겨보지 못한 탓에 생생한 현장감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다. 그 시간 난 산고의 고통에 시달리느라 바그너의 ‘무한선율’의 감동 혹은 고통, 아는 사람만 아는 ‘유도동기’의 발견에 동참하지 못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으로 직접 날라갈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대개의 오페라 애호가들은 영상으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감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혼자 집에서 영상으로 감상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좋게 말하면 바그너 작품의 스케일이 방대해서 그렇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보지도 않는데 짧게는 2시간 30분, 길게는 5시간 30분의 고행을 4일간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서 오페라를 감상하면 '체면'을 생각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쉽사리 졸거나 자리를 뜨기 어렵다. 물론, 그럼에도 심오한 바그너 오페라에 도저히 참지 못하는 관객들도 눈에 몇몇 띄었다. 기자 앞 남자 관객은 초반 공연 시작 전 보여준 '백스테이지 투어, 아티스트 인터뷰 영상'은 관심 있게 쳐다봤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10분이 채 되지 않아 편안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옆 남녀커플은 기자가 들고 있는 작은 설명지(로비에 배치)를 빌려 잠시 읽는 듯 하더니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1시간이 지났음에도 적응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종료 1시간여를 남겨두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작품 전반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곧 나올거니 겁 먹지말라고 옆 커플에게 귀띔해주었는데, 결국 나오지 않고 본 공연 실황으로 넘어갔다. 음악칼럼니스트 유정우의 해설을 호암아트홀 홈페이지에서만 들려주지 말고 극장에서도 직접 들려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대목이었다. 홈페이지를 찾아보는 관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 보였으니 말이다.
작품은 절대권력을 이루게 해주는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신과 거인, 난쟁이 부족 ‘니벨룽’, 인간이 갈등을 빚는 내용. 북유럽 신화 ‘지그프리트’에 기초했으며, 그 속엔 욕정, 사랑, 증오, 분노, 배신, 음모, 저주가 다 포함 돼 있다. 마치 한편의 대 서사시인 셈이다.

전 1막 4장의 악극인 '라인의 황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른 작품은 ‘2010 서울공연 예술제’ 초청된 러시아 연극 '폭풍'이었다. 연극 속에서 볼가강과 주인공의 집으로 공간 이동을 할 때 이용됐던 널판지가 오페라에서도 그대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원작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두 작품 모두 널판지를 이용해 시소놀이를 하듯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다. 물론 ‘라인의 황금’은 언뜻보면 널판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단단한 컨테이너 재질이었고, 보다 스펙타클하게 장면 장면을 연출했다.
이 움직이는 척추형(연출가 르파쥬의 표현에 따라) 모형물이 요동치면 모래와 자갈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라인 강 장면과 신들이 머무는 천상의 세계, 난쟁이 족 니벨룽의 지하세계로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특히, 천상세계에서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장면을 조명을 이용해 실제 계단처럼 연출한 장면에서 다들 입이 벌어졌다. 게다가 널판지 형상의 판 몇개가 시소처럼 움직이면 배 형상이 만들어지며 거인 형제인 파졸트와 파프너의 공간이 생겨난다. 다시 이 판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서면 신들의 무지개 다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식이다. 영상과 조명이 한 몫 한다. 물론, 가수들은 위험한 와이어에 매달려 두려움을 참아내며 목소리를 뽑아내야 한다.

‘라인의 황금’ 내용 자체가 복잡하다고 하지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라인강의 세 요정들 왈“사랑의 힘을 포기하는 자가 반지를 갖게 될 것이다.” ->난쟁이 알베리히 왈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을 바에 황금을 훔쳐 세상을 지배하는 반지를 만들겠다” ->책임지지 못할 거짓 약속을 한 신들의 신 보탄은 불의 신 로게의 간계, 부인 프리카가 속삭이는 ‘황금권력’에 끌려들어 지하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거기서 알베리히를 붙잡고 황금, 도깨비 감투, 이어 반지까지 빼앗는다. ->알베리히의 저주 “반지를 갖는 자는 누구나 죽는다”->보탄의 손으로 넘어갔던 반지는 지혜의 여신 에르다의 경고에 따라 거인 형 파졸트의 손에서 동생 파프너의 손에 끼워진다. 그 사이 저주의 기운은 이미 퍼져 형 파졸트는 동생의 손에 죽는다. ->이 모든 저주를 뒤로 하고 로게를 뺀 나머지 신들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 ‘발할라’성으로 떠난다.
이번 프로덕션의 '라인의 황금'을 본 사람들이라면, 난쟁이 알베르히 역의 바리톤 에릭 오웬즈의 매력에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하게 된다. 연극 같은 바그너 악극의 매력을 십분 살리면서도 안정감 있고 매력적인 목소리 연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클로즈 업으로 잡아준 영상으로 인해 생생한 땀방울 외에도 그의 위쪽 어금니 중 하나가 썩어있는 것 까지 잡힌 점 역시 이색적이었다. 단, 실제 공연장이 아닌 만큼 관객들이 선택적으로 장면 장면을 볼 수 없는 점,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호흡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따라가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요구에 부합할 수 없는 점은 스크린으로 보는 오페라의 한계점이다. 그럼에도 반지 시리즈 입문용으로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은 참으로 유용할 듯 싶다.
한 차례 반지시리즈를 맛보았다면, 11월 5일과 6일 양일간 상영되는 ‘바그너 발퀴레’를 꼭 챙겨보길. '바그너 라인의 황금' 지휘자와 연출자 그대로 투입. 바그너의 세계에 한번 발을 담그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 차례 발을 담갔다면 인내력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의 10개 작품 중 5월(20~22일)에 상영되는 글루크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에서는 금세기 최고의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와 미국이 자랑하는 디바 수전 그레이엄을 만나볼 수 있다. 6월(4~6일)에 상영되는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작은 거인'이라고 극찬한 테너 연광철을 만날 수 있다. 루치아의 가정교사 라이몬도 역을 맡아 열연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