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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⑧ 견고한 여름의 도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트로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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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5-10 22:36:57 수정 : 2012-05-10 22: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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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으로 황제자리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
1700년 전 옛이야기 들려줘
자그레브 남쪽, 아드리아의 푸른 바다를 낀 항구도시 스플리트을 처음 지도에서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도시 이름이 ‘균열(split)’이라니. ‘갈라짐’의 도시, ‘결별’의 시가지에선 눈물과 이별이 얼마나 흔한 것일까. 그런데도 스플리트, 그 이름을 가만히 발음하니 묘하게 어여쁜 느낌이 났다.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옛 달마티아의 땅. 스플리트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궁이 있다. 모래 바람이 걷힌 뒤 신비하게 드러나는 전설의 유적들처럼 이 황궁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에게만 1700년 전 로마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앞 마리앤 광장.
1. 사라진 황제의 꿈,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스플리트 근처에서 천민으로 태어나 로마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황제가 난립하던 시기에 20년간(서기 284∼305) 로마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한 그는 또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나 은퇴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고향인 스플리트에 바다를 향한 궁전을 짓고, 거기서 아픈 무릎을 치료하며 채마밭이나 돌보면서 노년을 보내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딸은 그가 자리를 내어준 후대 황제에 의해 납치당했다가, 결국 또 다른 정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세상의 그 어떤 금과 보석, 화려한 궁전이 가족의 처참한 죽음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비탄 속에서 삶을 마친 그도 자신의 영묘에서 그 썩은 유골마저 도난당하는 고단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니 저 화려한 궁전은 한 남자의 사라진 꿈이고, 뜨거웠고 쓰라렸던 한평생 덧없음의 증거물이다.

구시가지의 마리앤 광장은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일찍부터 붐비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여객선터미널과 버스터미널, 기차역이 모여 있기에 이곳은 스플리트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이 남문에서 궁전 탐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바다를 향한 이 광장은 열대의 야자수나무가 위풍당당하게 늘어서 있고, 짠내를 품은 해풍은 공중에 머물며 간혹 야자수의 머리칼을 흔들어댄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종탑의 내부. 경사가 급하고 큰 창문이 많아 쉽지 않은 코스다.
의아하게도, 바다를 향한 궁전의 꼭대기층에는 누군가 살고 있는 것인지 작은 나무창이 열려 있고, 티셔츠와 수건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자에 궁전 안에 있는 200개 건물에는 지금도 3000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인데 괜찮을까?’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보다야 구석구석 살림을 쓸고 닦는 다정한 손길이 나을지 모른다.

둥근 돌로 된 긴 회랑인 남문을 지나가면 오른쪽에 팔각형의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과 종탑이 나오고, 하얀 돌기둥이 죽 늘어선 페리스틸 광장이 나온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덤으로 쓰였던 곳은 지금 성 도미니우스 성당이 되어 그가 그토록 박해하던 기독교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돌계단 위 그늘에는 여행객들이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고, 할머니들이 말린 꽃 묶음을 돌기둥 옆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바람에서도 희미하게 라벤더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서서 1700년 전 열주의 안뜰과 그 시절의 해풍과 사람에 대해, 사람의 계획을 엎는 운명의 거대한 바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두컴컴한 성 도미니우스 성당을 둘러보았고 종탑 꼭대기까지 곡예를 하듯 떨면서 올라가 한눈에 스플리트을 담아 보았다.

이 종탑은, 장담하건데 유럽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계단이어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올라갈 만한 데가 못 된다. 두 번이나 모서리에 숨어서 숨을 돌린 후에야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 꼭대기에 올라, 푸른 유리 같은 아드리아해와 새빨간 스플리트의 지붕들을, 스러진 돌기둥 위로 잡풀이 자라는 디오클레티안 궁전 안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종탑에서 내려와 금문이라 불리는 북문으로 나가니 10세기 크로아티아의 그레고리 닌 주교가 성경을 들고 있는 어마어마한 동상이 서 있다. 그는 로마 교황에게 크로아티아어로 미사와 설교를 해달라고 설득한 사람이었다. 그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그래서 주교의 엄지발가락은 금빛으로 반질반질하다. 행운을 바라는 수만 번의 손길은 쇠를 금빛으로 윤을 내놓은 것이다. 나도 괜히 맹숭맹숭한 기분으로 그 거대한 엄지발가락을 한 번 문질러 보았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종탑에서 내려다본 스플리트의 풍경.
나는 다시 2만8000㎡가 넘는다는 요새를 겸한 이 거대한 궁전으로 돌아와 길 잃은 사람처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1000년의 시간을 지나온 돌담길 앞의 악사들도, 웃통을 벗고 다니는 남자들의 미소도 어룽거리는 신기루 같았다. 돌기둥 너머, 사라진 옛 로마제국의 거리가 신기루처럼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좁은 골목 사이에 의자를 내놓은 한량들과 반짝이며 윤이 나는 돌바닥과 꽃 핀 선인장 화분들. 불현듯 ‘도대체 이런 도시에도 겨울이 찾아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 도시는 완벽하게 여름만이 존재하는 그런 도시 같았다. 겨울이 오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도시.

나는 저물기 전에 푸른 아드리아해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마치 바다와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나는 아침에 숙소의 주인이 알려주었던 바닷가로 달려갔다. 언덕 아래 모래사장에서 비치타월을 깔고 누워 태닝을 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이국적(!)이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푸른 물빛. 물속에 들어가면 분명 스머프처럼 새파랗게 물이 들 것만 같았다.

나는 남은 오후를 수영하고, 야자나무 그늘에 앉아 저물녘까지 바다를 바라보는 데 쓰기로 했다. 어쩌면 라벤더 향기가 나는 바다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바다를 아주 오래 바라보면, 언젠가 아주 현실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시간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앞 페리스틸 광장. 이곳에서 관광객은 옛 로마제국 군복 차림의 남성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2. 달콤한 백일몽, 트로기르


숙소의 낡은 선풍기는 방향을 틀어야 할 때마다 턱, 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선풍기 날에 잘려진 바람마저 미지근해져서 나는 챙이 긴 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고 느지막이 나가 보았다. 밤늦게, 스플릿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트로기르에 도착해 숙박을 하고, 여태 그 거리의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트로기르는 걸어서 30분 안에 섬을 다 돌 수 있을 만큼 작아서 마치 작은 영화 세트장에 온 것만 같았다. 나는 트로기르 입구의 다리 오른쪽에 있는 청과시장에서 크고 향기로운 복숭아와 포도를 사서 걸으며 아침을 먹고, 먼저 옛 시청사와 마주하고 있는 성 로브로 성당을 찾아갔다. 이 성당은 500년쯤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정교한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라도반 정문이라 불리는 성당의 입구는 섬세하고 특이한 조각으로 유명하다. 유럽의 다른 성당에 비한다면야 이 성당은 그다지 오래된 성당은 아니다. 다만 그림이나 조각들이 아득한 원시의 사원인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사람도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돌계단을 올라 이 성당 꼭대기에서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트로기르를 내려다보았다. 이 섬의 중턱 어딘가, 일 포스티노에서처럼 늙은 시인이 유배되어 산다 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성당에서 나와 선착장에서 가까운 마을들을 돌아오는 코스의 배를 타고, 무작정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점점이 멀어지는 섬, 야자수, 해안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빨간 등을 헤아려 보았다. 말이 없는 뱃사람은 앞만 보고 배를 몰았고, 허술한 나무 선착장에서 수영 튜브를 든 사람들이 탔다가 내리곤 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습기라고는 없는 물 위의 시간이었다.

이토록 나른하고 파스락거리는 긴 하루. 누가 밤이란 밤은 모두 냄비 위에서 졸여 버렸는지 이 섬에는 저녁 8시가 지나야 노을이 물들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러니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누워 뒹군대도, 시간을 휴지처럼 풀어 버린대도 누가 나를 탓할 수 있겠는가. 완벽하게 여름만 존재하는 도시. 그대로 여름인 도시. 나는 이 여름을 절대 놓치지 않으리란, 하얀 다짐만 하며 출렁이며 흔들리며 물 위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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