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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⑨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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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5-24 18:25:04 수정 : 2012-05-24 18: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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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마다 바다를 품은 ‘아드리아해의 진주’

내게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가령 한여름의 모기를 만든 하느님의 뜻이나, 안녕과 안녕처럼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가 같은 것, 여전히 아이인 사람의 거죽이 거짓말처럼 늙어가는 것, 그리고 책상 위의 소라껍데기 속에서 들려오는 아드리아해의 파도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소파 밑의 동전처럼 늘 의아한 채로, 아리송한 채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달의 뒤편처럼 막막한 돌산의 풍경을 지나 느릿한 캠핑카들의 꽁지를 따라 해안도로로 한나절을 달렸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군복을 입은 국경경비대 요원들이 짐을 잔뜩 실은 여행자들의 차를 하나씩 물고 늘어졌다. 크로아티아는 유고 내전 후 보스니아에 의해 국토가 나뉘었다. 그래서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려면 보스니아 국경을 지나야 하고 여권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해안 절벽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바로 옆에 펼쳐진 푸른 바다가 풍덩 뛰어들고픈 마음이 일게 만든다.
1. 지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

뙤약볕과 돌산과 국경경비대가 가로막고 선 그곳에, 시니컬한 버나드쇼가 지상낙원이라 칭한 곳, 내전으로 폭격을 받을 때 유럽의 지성들이 격노하고 시민들이 인간띠를 만들어 지키고자 했던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 위 반 뼘밖에 안 되는 그 거리를 하루종일 달리는 동안, 차에서 비스킷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아드리아의 푸른 바다는 잠깐씩 서늘한 눈빛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나를 어르고 달랬다.

‘sobe’(방)이라고 써 붙여 놓은 바닷가의 민박집들 앞에서 무작정 차를 세우고 그 바다에 풍덩 빠져들고픈 순간은 얼마나 많았는지…. 바닷가 마을의 유혹을 거듭 물리치며 해거름에야 다다른 두브로브니크의 거대한 현수교 너머, 웅장한 돌의 성곽과 영근 오렌지빛의 지붕들이 빽빽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울컥 하고 가슴에서 파도가 솟구치기도 했다.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바깥에서 바라본 항구. 두브로브니크는 “1년 중 300일이 맑다”고 할 만큼 날씨가 좋다.
인터넷 예약으로 미리 구해 놓은, 옛 시가지를 지나 해변 언덕의 민박집은 발코니 창을 열면 그대로 절벽이었고 그 아래는 드넓은 바다, 아득한 푸르름이었다. 절벽에 집이 있고 그 아래 절벽에 집, 층층이 절벽과 집…. 어디에서도 바다를 피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코코아 빛으로 그을린 젊은 집주인은 싱글거리며 나타나더니 에어컨 사용법과 바다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는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금세 떠나 버렸다.

창문마다 바다를 품고 있고, 초록빛 로크룸 섬이 그 한가운데 떠 있었다. 멀리 거대한 크루즈선과 알록달록 젤리빈 같은 물놀이 튜브들이 떠다니고, 선베드 위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 나는 가방에 챙겨온 고무 슬리퍼를 꺼내 신고, 절벽 아래 800개의 계단을 달려 내려가 그 바다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드디어! “이곳은 지상의 낙원, 두브로브니크입니다, 여러분!” 감격에 겨워 중계방송이라도 하고 싶었다. 파도에 쓸려오는 모래알처럼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끼면서 노을빛에 가슬가슬 부서지면서 나는 바닷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햇살 좋은 돌계단에 잠시 앉아 쉬어가는 여행자가 많다.
2. 완벽한 끌림에 대하여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을 떠도, 그대로 꿈속이었다. 커튼 뒤로 수천만 마리의 푸른 나비떼가 날아와 뒤채이고 있어서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 수천만 마리의 푸른새, 푸른 말의 울음소리다. 문을 열면 이 꿈이 깨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를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꾸물거리던 나는 옛 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숙소에서 가까운 동쪽의 플로체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길 아래로는 하얀 모래 해변과 선박이 매인 작은 항구가 보이고, 견고해 보이는 중세의 성곽이 보였다.

성벽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성 안은 1667년 대지진 때 스폰자 궁전과 렉터 궁전을 빼놓고 거의 파괴되어 폐허나 다름없던 곳이었다. 그때 두브로브니크는 5000명이 죽는 대참사를 겪었고, 이후 1808년에는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았다. 1991년 발발한 유고 내전 때에도 2000발이 넘는 포탄이 또 한 번 이 유구한 중세의 성을 벌집처럼 꿰뚫었다. 이후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재건한 것이 오늘날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전쟁이란, 이성을 잃게 만드는 분노란 이런 것이다. 승자는 어디에도 없고, 상처 입은 패자만이 남아 총탄 자국 선명한 이 지난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다행히 이곳은 옛 건물들이 그 상흔마저 감싸안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리고 영혼을 주고라도 맞바꾸고 싶은, 하늘 빛과 바다 빛 그대로 멈추지 않고 일렁이고 있다.

시계탑은 벌써 한낮을 가리키고 플로체 게이트 앞은 벌써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 앞 도미니크 수도회와 박물관을 지나 곧바로 나오는 널찍한 플라차 거리는 원래는 바닷물이 흐르던 운하였던 것을 매립해 도로로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저 돌바닥 깊이 아직 갇힌 바닷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사람들이 잠들면 대양을 그리워하며 훌쩍이는 작은 파도가 이곳 사람들의 새벽 꿈을 찾아갈지도 모른다.

도로 양쪽으로는 카페와 젤라토 가게와 옷가게,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중세의 귀족 옷을 입고 기념동전을 만들어 파는 청년, 왕관 앵무새를 데려와 여행자들에게 사진을 찍게 해주는 할아버지, 나무로 만든 마리오네트로 작은 인형극을 펼쳐 꼬마들의 넋을 빼놓는 아저씨들이 느슨하게 서서 웃고 있는 여행자들과 함께 성 안을 마치 놀이동산처럼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도로 끝 종탑과 큰 오노프리오스 샘까지 걸어갔다. 이 샘은 1438년, 성에서 20㎞ 떨어진 바깥에서 끌어온 물을 모든 시민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돔 형태의 물탱크인데, 둥글게 늘어선 16개의 수도꼭지에선 여전히 물이 나오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이마와 목을 조금 적시고, 그 모서리 건물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둘러본 뒤 1317년에 문을 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에도 들어섰다.

빛바랜 회랑에서는 희미한 약초 냄새가 나는 듯하고, 약국 안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여자 약사가 갖가지 허브로 된 약들과 일반 약국에서 파는 약들을 함께 팔고 있었다. 낡은 선반에 조르르 진열된 오래된 유리병들을 보면 꼭 ‘불로장생의 약’이나 ‘사랑에 빠지는 약’, 혹은 ‘불행을 비껴가는 약’ 같은 걸 팔 것 같았지만, 나는 하릴없이 바르는 모기약이나 하나 사서 들고 나왔다. 사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때만큼 서운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어떤 것들을 찾으면, 내가 찾아 헤매는 것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두브로브니크로 들어가는 현수교. 이 다리를 건너면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가 마법처럼 펼쳐진다.
좁은 골목마다 거리의 화가들은 이 이상한 성 안의 풍경을 그려대고 있었고, 카페에서 내놓은 테이블 아래에는 게으른 고양이들이 사람은 아랑곳 않고 드러누워 있었다. 로마의 스페인 계단을 떠올리게 하는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 앞의 계단과 뱃사람을 위한 식당, 그 위 느티나무 아래의 고독한 그늘을 그리고 싶어 나는 그림을 배우지 못한 나를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성 안의 풍경은 완전히 낯설고 완전히 진실하다. 이전의 삶을 모두 접고 눌러앉고 싶을 만큼 절대적인 끌림이다.

3대째 이어온다는 이발소의 돋보기를 낀 할아버지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호박 목걸이와 그림엽서에 넋을 빼앗겼다가, 그렇게 골목과 골목에 스몄다가 나는 프란체스코 수도원 옆 계단에서 시작되는 성벽 투어를 하기 위해 표를 샀다. 13세기에 짓기 시작해 16세기에 완성한 두브로브니크 성벽은 길이 2㎞, 높이가 25m에 달한다고 한다. 오후의 햇살은 먹먹한 사람의 속까지 말려 놓는 듯하고, 성벽 위에서 바라본 바다 그 시푸른 영원은, 삶이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 진정한 완벽함이란 이유를 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처럼,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된다.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하다면 이곳 상인의 딸로 태어나리라, 뭐 그런 생각이나 하게 만든다. 다음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에 오르고, 다시 이곳에서 멀미 같은 파도를 한없이 바라보리라. 달빛 아래 떠나는 크루즈선과 내가 아닌 모든 것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리라. 들뜬 나는 좀처럼 성벽 위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계속 서성이면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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