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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4〉 영조와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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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1-12 20:52:09 수정 : 2014-01-12 20: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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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사도세자와 불화는 끝내 극복 못한… 슬픈 ‘탕평의 제왕’ 시대와는 탕평했으되 끝내 아들과는 불화했던 슬픈 아버지 영조(英祖·재위 1724∼1776). 위기 속에서 자라 숱한 고난을 겪으며 간신히 조선 제21대 임금에 오른 그가 세상에 끼친 흔적은 녹록지 않다. 역사책에는 탕평책(蕩平策)을 디자인하고 펼친 영명한 임금, 이야기책에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비정의 부왕(父王)의 모습으로 더 또렷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조의 이미지는 ‘슬픈’ 또는 ‘포악한’ 아버지 모습이 더 크다. 슬픔[悼]을 생각[思]하게 하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버지인 것이다. ‘사도’는 아버지가 내린 이름이다. 그 슬픈 드라마가 탕탕평평의 이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치 못할 장면일 수도 있었다는 일설(一說)을 접하면 사람들, 많은 아버지와 아들들의 마음이 무겁겠다.

멋진 아들로 자라주기를 바라 마지않던 임금 아버지의 애정과 기대의 과잉이 부른 부자 사이 갈등도 이 드라마에서 비중 큰 요소였다. 더 비뚤어지고 망가지는 아들의 모습도 그렇고, 그 곁가지 얘기 하나가 또한 가슴 후빈다.

사도세자의 비(妃), 즉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이 사위를 죽게 한 일에 관해 사돈인 영조에게 올린 글이다.

“이번 일은 전하가 아니셨으면 어떻게 처치할 수 있었겠습니까? 외간에서는 전하께서 결판을 짓지 못하실까 염려하였는데, 필경 결판을 지어 혈기가 장성할 때와 다름이 없으셨으니 신은 흠앙하여 마지않았습니다.”(‘고전소설 속 역사여행-한중록 편’ 참고)

흠앙(欽仰)은 공경하고 우러른다는 말, 신(臣)은 홍봉한 자신이다. 영조의 정치 파트너로,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다음 왕 정조(正祖·재위 1776∼1800)의 ‘수호천사’ 역할까지 맡아야 했던 노회(老獪)한 정치인의 그 ‘흠앙’ 속에는 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었을까.

‘한중록’은 나중에 혜경궁 홍씨가 쓴 것으로 당시 상황과 피맺힌 마음을 그렸다. 한중록(閑中錄)에서 한 글자를 원통하다[한(恨)]는 자로 바꿔 한중록(恨中錄)이라고도 한다.

영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나 사진을 어진이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러나 그 ‘드라마’는, 엄청난 지명도(知名度)나 극적인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의 역사상 의미를 망가뜨리지는 못한다. 당시로서는 탕평책이 워낙 큰 개념의 정치 이데올로기였고, 당쟁(黨爭)정치 영향의 당사자이기도 한 영조가 아니면 꺼내들지 못할 카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왕좌에 오르자마자 일성(一聲)으로 내질러 아버지의 죽음과도 관련 있는 조정 대신들을 벌벌 떠는 사시나무로 만든 정조의 시대 내내 그 탕평책은 활발하게 기능했다. 지금도 정치용어로 그 생명력을 당당히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1730년 정월 중순, 영조는 당시의 양당(兩黨)인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두 ‘두목’ 민진원과 이광좌를 각각 불렀다. 왕과 기록관인 사관(史官) 등 네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영조는 탕평을 하교(下敎·지시)했다.

직책상 네 사람은 서로 까칠한 사이. 오고 간 말들이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탕평책의 본격적인 개시였다. 임금으로서 ‘탕평’의 염원을 키워온 6년의 결실이었다.

탕평은 고대 중국의 고전으로, 오경(五經) 중 하나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조항에 있는 글귀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에서 비롯한 말이다. 치우치거나 무리 짓지 아니 한다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이 왕의 길, 즉 왕도(王道)에 탕탕하고 평평한 덕성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탕탕(蕩蕩)은 넓은 모양, 평평(平平)은 고른 모양이다. 이 말을 합친 탕평은 싸움 시비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함을 이른다. 탕평책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정책을 말하는 (정치)용어다.

영어에 더 익숙한 세대에게 탕(蕩) 또는 탕탕(蕩蕩)이란 말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리버럴(liberal)’이다. 자유로운 또는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것과도 맥(脈)이 통한다. 자유로움이 지나치면 ‘too liberal’, 곧 방탕(放蕩)이 된다.

물 흘러가게 한다는 뜻에서 (물로) 쓸어낸다는 소탕(掃蕩)의 의미도 가진다. 큰 물 위에서 흔들리는 수초(水草)의 모양에서 자유롭거나 크고 넓다는 뜻도 파생됐다. 요즘 말 ‘빚 탕감’의 탕감(蕩減)은 비로 쓸어내듯 모두 감면(減免)해 주는 것이다. 볼수록 리버럴한 개념이다. 이런 게 문자 활용의 맛이고 멋이다.

평(平)자, 물 위에 뜬 풀 수초 부평초(浮萍草)는 평평하다. 그리고 그 모양은 안정적이다. 그 모양을 그린 글자가 너르고 편안하고 공평하다는 뜻 보듬은 평평할 평(平)이다. 아름다운 말 평화(平和)의 뜻, 여기서 비롯된다.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정책으로 세상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탕평책과 영조·사도세자 부자(父子) 간의 극적이고 역사적인 갈등, 그 둘은 후세 사람들의 생각에서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그 탕평책’을 시행한 영조가 사도세자의 ‘그 아버지’라는 얘기를 들으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가 상당수일 터.

영조의 친필(親筆·손글씨)을 새겨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쟁의 폐풍에서 벗어나 참된 인재가 되라”는 뜻을 전했다.
성균관대 제공
경기 수원 화성(華城)이 또 다른 ‘슬픈 임금’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건설됐다는 것도 관련 있는 얘기다. 수원과 과천 사이 지지대고개 이름의 유래도 그렇다.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묘소에서 멀어지는 것이 서러워 정조가 몇 번이고 “천천히[지(遲)] 좀 가자”고 했다 하여 지지대(遲遲臺)가 됐다 한다. 용주사(龍珠寺)는 당초 이 무덤 융릉(隆陵)을 지키는 절이었다.

어린 정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 임금 영조가 왕통(王統)의 핏줄을 잇기 위해서라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自責)했다 한다. 회한(悔恨)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나는 하늘을 꿰뚫고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의 효심의 바탕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어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최후를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들은 것 같다. 그래선지 정조도 탕평책을 아주 튼실하게 폈다, 할아버지 영조처럼.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 사족(蛇足)

특이한 유래의 이름으로 또한 관심을 끄는 묵무침요리 탕평채.
농촌진흥청 제공
탕평채(蕩平菜)라는 요리의 ‘탕평’은 탕평책의 탕평이다. 청포묵(녹두묵)에 고기볶음·미나리·김 등을 섞어 무친 요리다. 채(菜)는 나물이나 푸성귀를 이르는 말에서 반찬이란 말까지 그 뜻이 많아졌다.

이 이름은 영조 때 탕평책을 의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때 마침 올라온 묵무침의 모양과 그 만든 방식이 탕평의 뜻과 흡사하다는 얘기가 돌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조선왕조 중엽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서 청포(淸泡)묵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온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름의 특이한 유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고,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살아있는 경우다. 매끈한 묵의 감촉이 주는 식감 때문에 지금까지도 주안상(酒案床)의 인기 메뉴다.

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은 탕평채라는 이름의 청포묵무침 요리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굵게 채 썬 녹두묵을 데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하고, 채 썬 쇠고기와 당근을 양념하여 볶고, 미나리는 데쳐서 한데 버무려 간장·식초·참기름으로 양념하여 채 썬 황백(黃白) 지단과 실고추 김을 고명으로 올린다. 지단은 계란의 흰자 노른자를 따로 부쳐 만든 고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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