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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의거 105주년] (下)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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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1-29 17:23:05 수정 : 2014-02-13 13: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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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서도 독립 위해 노력”… 安의사 당당한 유언 들리는 듯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이라는 역사적인 의거를 결행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11월1일 하얼빈을 떠나 이틀 후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으로 압송됐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영어의 몸이 됐다. 이곳의 현재 명칭은 다롄(大連)시 뤼순커우(旅順口)구 샹양제(向陽街) 139호로 주소지가 등재된 역사박물관 ‘뤼순일러(日俄)감옥구지(舊址)’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144일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인류 평화의 염원을 담은 미완의 역작 ‘동양평화론’을 남긴 뒤 1910년 3월26일 순국했다.


박물관에서 안 의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수감됐던 감방과 교형실(교수형 집행실)이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붉은 벽돌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건물 벽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안 의사는 일본 국사범으로 분류돼 간수부장 당직실 옆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11차례 일본 검사의 신문을 받은 뒤 감옥 인근 고등법원 법정에서 여섯 번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도 세계를 향해 조국 독립의 정당성과 자신의 동양평화사상을 웅변했다. 1910년 2월14일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일본 정부는 재판 전에 이미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재판부에 비밀 통지했다. 그는 판결이 부당하다면서 인정하지 않았지만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다. 다만 집필 중이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재판부에 사형 집행 기일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재판부는 형 집행까지 수개월이 남았다고 안 의사에게 밝혔다. 그러나 형은 한 달 남짓 후에 집행됐다.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고등법원이다.
안 의사 사형이 서둘러 집행되면서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았다. 이 책은 당초 서(序),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의 5개 장으로 구상됐으나 서와 전감 일부만 완성됐다. 교형실에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방 벽면에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 의사가 순국한 곳이란 팻말이 보였다. 일본 기록에는 안 의사가 3분 동안 기도한 뒤 10시4분 사형이 집행돼 10시15분 숨진 것으로 나와 있다. 이국 땅에서 31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교형실에 남아 있는 한복 차림의 안 의사 사진과 길게 늘어진 교형줄이 그날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박용근 다롄안중근연구회 회장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을 가리키며 안 의사의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
뤼순감옥을 비롯해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 등 이 일대의 안중근 의사 유적지가 발굴, 보존된 데는 1992년 세계일보가 추진한 국민성금을 통해 설립된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홍일식)의 활약이 컸다. 당시 전현직 대통령은 물론 많은 국민의 참여속에 성금 17억9000여만원을 모아 뤼순감옥내 안중근 독립추모관을 만들고 관동법원구지를 매입, 기념관을 만들었다. 박귀언 재단 상임이사는 “20여년간 중국 지역에서 안 의사의 유물과 유적을 발굴, 복원하고 다양한 선양사업을 펼쳐왔다”면서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못한 안 의사 유해를 찾고 있지만 관련 자료가 적어 진전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뒤 유골을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 측은 안 의사 유해를 유기했다. 안 의사 유해발굴은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다례안중근연구회 등 관련단체와 후손의 지상 과제로 남았다. 뤼순에 정착한 재중동포인 박용근 다롄안중근연구회 회장은 “안 의사는 물론 민족의 기와 혼 모두 뤼순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면서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미련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는 “유해 발굴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제 유해 존재 여부를 결론지을 때가 됐다”면서 “우리가 할 일은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교형실. 의자 위 사진에는 모친이 보내준 흰 한복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는 안 의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안 의사는 일본이 아시아 각국의 이익을 중시한다면 침략적인 대외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검찰관에게 이런 뜻을 직접 밝혔고, 때로는 한문 글귀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일침을 가하려 했다. 한 세기 전 안 의사가 남긴 옥중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들은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과 침략사를 반성하기는커녕 극우 행보를 강화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후안무치를 꿰뚫어보는 듯하다.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계를 고쳐야 한다. 때를 지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동양 대세를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 것인가. 정략(침략전쟁)을 바꾸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뤼순=글·사진 신동주 특파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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