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이라는 역사적인 의거를 결행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11월1일 하얼빈을 떠나 이틀 후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으로 압송됐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영어의 몸이 됐다. 이곳의 현재 명칭은 다롄(大連)시 뤼순커우(旅順口)구 샹양제(向陽街) 139호로 주소지가 등재된 역사박물관 ‘뤼순일러(日俄)감옥구지(舊址)’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144일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인류 평화의 염원을 담은 미완의 역작 ‘동양평화론’을 남긴 뒤 1910년 3월26일 순국했다.
박물관에서 안 의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수감됐던 감방과 교형실(교수형 집행실)이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붉은 벽돌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건물 벽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안 의사는 일본 국사범으로 분류돼 간수부장 당직실 옆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11차례 일본 검사의 신문을 받은 뒤 감옥 인근 고등법원 법정에서 여섯 번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도 세계를 향해 조국 독립의 정당성과 자신의 동양평화사상을 웅변했다. 1910년 2월14일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일본 정부는 재판 전에 이미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재판부에 비밀 통지했다. 그는 판결이 부당하다면서 인정하지 않았지만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다. 다만 집필 중이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재판부에 사형 집행 기일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재판부는 형 집행까지 수개월이 남았다고 안 의사에게 밝혔다. 그러나 형은 한 달 남짓 후에 집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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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고등법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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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근 다롄안중근연구회 회장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을 가리키며 안 의사의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 |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뒤 유골을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 측은 안 의사 유해를 유기했다. 안 의사 유해발굴은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다례안중근연구회 등 관련단체와 후손의 지상 과제로 남았다. 뤼순에 정착한 재중동포인 박용근 다롄안중근연구회 회장은 “안 의사는 물론 민족의 기와 혼 모두 뤼순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면서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미련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는 “유해 발굴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제 유해 존재 여부를 결론지을 때가 됐다”면서 “우리가 할 일은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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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교형실. 의자 위 사진에는 모친이 보내준 흰 한복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는 안 의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계를 고쳐야 한다. 때를 지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동양 대세를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 것인가. 정략(침략전쟁)을 바꾸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뤼순=글·사진 신동주 특파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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