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에 따르면 물건의 주인은 그것을 권리 없이 점유한 자에게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금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통설이다. 금전은 고도의 유통성이 있기에 일반적으로 금전을 점유하는 자가 곧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법에 전혀 근거가 없고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이론이다. 먼저 우리 민법은 소유와 점유의 구별이 금전에도 적용됨을 전제로 하는 규정이 있다. 도둑한테서 훔친 돈을 받은 사람은 훔친 돈인 줄 알 수 없었던 경우에 한해 완전한 소유권을 취득한다고 한다. 돈을 점유하는 도둑이 소유자라고 보면 성립할 수 없는 규정이다.
영국 속담에 ‘돈에는 귀표(주인을 가리기 위해 가축의 귀에 한 표시)가 없다’고 한다. 통설은 돈에는 표시가 없어 주인을 가리기 힘들다는 현상에 착안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권리의 존재의 문제와 증명의 문제를 혼동한 것이다. 내가 도둑맞은 돈은 내 돈임에는 틀림없지만 단지 그걸 증명하지 못해 반환청구를 하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이 이론은 정황상 주인이 명확한 경우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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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 |
‘금전은 점유 있는 곳에 소유 있다’는 학설은 결국 힘이 곧 법이 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원래 이 이론은 1930년대 말 전통적인 법 개념과 형식을 평가절하한 독일 나치시대의 이론을 일본 학자가 수입해 퍼트린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도 우리 학계에서 이 위험한 이론을 반성 없이 답습했다.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다. 식민청산에 있어서는 법분야도 예외가 아닌 듯싶다.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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