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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의세계,세계인] 이란이 시아파 종주국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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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2-01 21:11:56 수정 : 2016-02-01 21: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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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갈등 아닌 정치적으로 등장한 분파
16세기 사파비왕조가 국교로 삼아 융성
최근 이란이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경제제재 해제 이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란을 방문해 돈 보따리를 풀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1400년 지속된 종파 간 ‘핏빛 갈등’이 재점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는 큰 충돌을 벌여 오지 않았다. 시아파가 등장한 초창기 수십년 동안에만 권력과 주도권을 놓고 극심한 싸움이 있었다. 종교적 교리를 두고 벌인 심각한 대립도 거의 없었다. 시아파가 종교 교리가 아닌 정치적으로 등장한 파벌이기 때문이다. 주류파인 수니파에 밀려 억압과 소외만 받아온 것이 시아파다. 권력집단 수니파에 저항할 힘도 없었다. 양측 간에 거대한 핏빛 충돌이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이슬람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원래 이름은 알리의 파다.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 무함마드의 진정한 후계자가 바로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라고 주장하는 정치집단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이 때문에 알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3명의 칼리파(후계자)에 이어 4번째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지배가문에게 의해 독살되고 만다. 큰아들도 독살되고, 둘째아들 후세인은 저항하다 무참히 처형된다. 지금도 시아파 종교 행사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이 후세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후로 이라크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시아파들은 8세기 동안 억압을 받아왔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 가문의 혈통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어느 정권에서나 위험한 도전 세력이었다. 억압을 받고 쫓겨 다니다 보니 강력한 공동체 지도자가 필요했다. 수니파에는 없는 성직자 제도를 만들었다. 현재 시아파 이슬람공화국으로 불리는 이란에서 대통령 위에 최고 성직자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1501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다. 이란이 현재 시아파 종주국이 된 배경이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도 세속주의 왕족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시아파 성직자가 권력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후다. 사담 후세인이 1980년 이란을 침공해 8년 동안 전쟁을 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라크 인구의 65%가 시아파였기에 이란의 이슬람혁명 수출은 후세인에게 심각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의 역내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사담 후세인 수니파 정권이 몰락했다. 인구의 65%를 차지하던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연결하는 시아파 벨트가 연결됐다. 수니파 테러세력 이슬람국가(IS)가 등장해서 이라크와 시리아 중앙정부, 그리고 다른 시아파 주민을 상대로 무참한 테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현재 이란과 사우디 갈등, 그리고 IS의 준동 모두 정치적 패권과 권력다툼이다. 수니-시아파의 종교적 갈등은 여기에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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