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두노총’, ‘혼자 온 사람들’, ‘전국 고양이 노동조합’, ‘얼룩말연구회’….
10차까지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재치와 풍자, 해학이 가득한 깃발들이다. 과거 집회 현장에서의 깃발이 조직된 대오를 이끄는 투쟁의 상징이었다면, 이번 촛불집회 때 등장한 깃발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일그러진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다. 이색 깃발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혼참러’(혼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집회 현장에서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 수 있는 역할도 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동조합은 31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이 같은 깃발이 한데 어울린 ‘아무 깃발 대잔치’를 진행했다. 공공운수노조 유남미 전략팀장은 “민주노총을 패러디한 ‘만두노총’에서 공공운수노조를 ‘새우만두노조’로 만들어 줘 고마웠다. 공공운수노조 문양이 마치 꼬리를 든 새우만두 모양과 비슷하다며 새우만두라고 지었다고 한다”며 “깃발을 들고 오신 분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께 새우만두를 쏘려고 준비했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 등장한 깃발은 35개 남짓.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화제가 된 깃발 제작자들을 만나 깃발을 만든 이유를 들어봤다. 깃발에 적힌 문구에는 저마다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전국고양이노동조합’ 깃발을 들고 참석한 정성우(21)씨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제일 대표적인 노조라서 만들면 재미도 있고 화제도 될 것 같아 시작했다”며 “동물들의 노동,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요한(26)씨는 지난 2차 촛불집회 때 경기 평택에서 혼자 참가하던 사람들과 함께 ‘혼자온사람들’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고 한다. 그는 “혼밥, 혼술처럼 혼자 무언가를 하는 세상인 만큼 혼자 와서 집회를 즐기다 (앞으로는)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깃발을 만들었다”며 “이제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 500여명의 사람들도 뒤 따라올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했다.
윤정훈(29)씨가 들고 온 ‘한국곰국학회’ 깃발에는 대학원생들의 서글픈 현실이 반영돼 있었다. 그는 “‘논문’을 거꾸로 하면 ‘곰국’이다. 그래서 깃발에 있는 곰탕 사진도 거꾸로다”라며 “교수한테 시달리고, 논문에 피폐해지는 대학원생들의 노동과 현실을 외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많은 대학원생들이 공감해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는 그다.
그렇다면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엔 어떤 함의가 담겨 있을까. 자신을 ‘화실련 보이드’라는 계정으로 소개한 깃발지기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 웃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깃발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묘총이나 얼룩말학회 등 동물 관련 깃발이 많이 화제가 됐는데,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하듯,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식물의 마음을 헤아려주자는 취지에서 화분을 골랐다”며 “어느 집에나 화분은 있지만 화분에 대한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는 데에 대해 의문을 갖고 화분안죽이기시민연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한재영 인천본부 조직국장도 이날 행사에 ‘고혈당’ 깃발을 들고 참가했다. 한 국장은 “국민의 혈세를 갖고 사리사욕을 채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혈압 안 오른 국민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고혈당이라는 이름을 착안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디자이너 최모(30)씨의 깃발에는 ‘무도본방사수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MBC 예능 ‘무한도전’은 촛불집회와 대체 무슨 관계일까. 최씨는 “촛불집회가 매주 토요일 저녁에 진행되니 무도랑 겹친다. 집회는 나가야겠고, 무도는 포기하기 싫고…. 나처럼 촛불집회 때문에 무도를 못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제작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 신기했다. 그래서 깃발을 들고 매주 광장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얼룩말 연구회’ 깃발의 주인공은 숭실대생 김현수(21)씨. 그는 “토끼나 고양이가 등장하는 패러디 깃발을 보고 혼자 만들었는데, 이제는 다른 시민분들도 참여하신다”며 “학교 상징이 말이라 얼룩말을 골랐다. 특별한 의미 없이 집회를 좀더 유쾌하게 만들어보고자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들 깃발을 본 시민들은 유쾌하다는 반응이었다. 김소환(58)씨는 “(이런 깃발은) 우리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요소”라며 “쌓인 분노를 재미로 표출하는 풍자와 해학이 더 많은 국민을 광장으로 끌어모은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전북 전주에서 광화문을 찾았다는 조모(43)씨도 “표현이 자유로운 사회야말로 민주주의 사회”라며 “재미있게 표현함으로써 진정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장일수(40)씨는 “우리나라 하면 ‘풍자의 나라’아니겠는가”라며 “그동안 정치권이나 재계의 비리가 터지면 ‘OO시리즈’ 등으로 재미있는 풍자 콘텐츠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한민국 특유의 풍자, 해학, 계골미가 이런 깃발에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유태영·김지현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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