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육군 모 사단장이 당번병과 공관병에게 폭언을 하고 과도하게 사적인 일을 시켰다는 군인권센터의 폭로로 '당번병'과 '공관병'이라는 군대 용어가 관심을 모았다.
당번병(지휘관실 근무병)과 공관병(공관 근무병)은 장성급 지휘관이 있는 독립 여단급 이상의 부대에 두도록 돼 있다. 장성급 지휘관은 여기에다 부관의 보좌도 받는다. 공관은 지휘관이 공적으로 쓰는 저택을 가리킨다.
부관이 비서실장이라며 당번병과 공관병, 운전병은 비서들이다.
당번병은 보통 커피 등 차(茶) 봉사와 군화 닦기, 빨래 챙기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다하기에 따까리(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라고도 불렸다. 넓은 의미에서 공관병도 따까리에 들어간다.
군생활이 아주 힘들었던 시절엔 당번병은 이른바 '꿀보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상대적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탓이다.
7080세대가 추억하는 당번병(공관병 포함)의 세계를 통해 지금의 당번병이 겪는 희로애락을 들여다 본다.
▲마누라보다 더 편한 사람이 당번병, 그 이유는
1980년대 초반 참모총장 당번병을 지냈던 A씨는 "참모총장이 자신의 부인보다 나를 더 의지하고 편하게 생각했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들어보면 "맞는 말이다"라며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참모총장이면 별을 단지 10여년이 된다. 당번병 수발을 10년가량 받았다는 말이다.
A씨 아침 일과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참모총장 의복의 준비이다.
A씨는 '팬티-러닝셔츠-왼쪽 양말-오른쪽 양말-왼쪽 장갑-오른쪽 장갑' 순으로 개어놓은 의류를 대령해 놓는다. 물론 정복과 모자도 옆에 대령한다.
그러면 참모총장은 순서대로 1분도 안 돼 다 입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이다. 사람마다 오랜 습관에 따라 먼저 입는 의복이 따로 있다. 팬티 또는 러닝셔츠를 먼저 입거나 양말 먼저 찾는 이도 있다. 양말도 습관적으로 오른쪽이나 왼쪽 먼저 신는 이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당장 자신의 옷 입는 습관을 돌아다 보라. 틀림없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차려입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어쩌다 부인이 남편 의복을 준비할 때면 참모총장은 영 심기가 불편하다. 부인은 당번병과 달리 남편이 뭘 먼저 입는지 잘 모른다. 양말은 왼발이 먼저인지, 오른발 먼저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부인 탓에 리듬을 잃어버린 참모총장은 혀를 차곤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되뇌곤 했다고 한다. "마누라보다 당번병이 더 편해~."
▲강압적 군 시절 땐 '꿀보직'
군생활이 힘들었던 시절일수록 당번병은 꿀보직 중 최고로 꼽혔다.
무엇보다 훈련에서 열외 혜택을 받았다. 그 힘들었던 점호와 집합(아주 예전엔 집합 자체가 구타라는 말과 동일시됐다)에서도 제외됐다. 여기에 웬만한 상관들도 지휘관과 가까운 당번병을 막 대하지 못하는 만큼 특권 아닌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아무나 될 수 없었던 당번병, 간택 이유도 가지가지
지휘관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당번병 타입이 있다. 요즘에야 추첨에 따라 보직이 결정되지만 1970~80년대는 장성이 찍으면 그만이다.
그럼 누가 당번병이 될까.
당번병은 무엇보다 지휘관 마음에 들어야 하지만 키와 종교, 학벌, 고향 등도 고려요소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키 크고 잘생겼으면 당번병은 떼논 당상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으나, 그건 아니다.
1980년대 초 수도권 핵심 부대 사령관의 당번병을 지낸 B씨는 키가 작았다.
사실 B씨는 그 부대에 갈 조건이 못됐다. 당시 그 부대에 가려면 평균 키보다 5cm가량 커야 했지만 상고 출신인 B씨는 타이핑 솜씨가 극히 뛰어나 부대 행정병으로 특별히 뽑혔다.
밤낮으로 타이프를 두들기던 B씨는 어느 날 사령관 당번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가장 큰 이유는 B씨의 아담한 체구. 키가 작았던 사령관은 자신의 키와 엇비슷한 당번병을 내심 원했다. 이를 눈치챈 인사 참모가 눈을 부릅뜨고 부대를 살폈지만 모두 패션모델급 키를 가진 병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키가 작은 B씨를 발견, 그냥 당번병으로 낚아챘다.
당번병의 조건 중 종교도 중요하다. 장군과 행동을 같이하는 당번병이기에 종교가 같아야 예배나 미사, 불공 등이 있을 때 함께할 수 있다.
▲휴일 때 봉투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당번병
과거 당번병(공관병)은 휴일도 없었다. 지휘관을 대신해 예식장 등을 찾아가 봉투를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식 외출증을 끊어 움직였다. 높은 자리일수록 가볼 곳이 많았기에 당번병은 장성의 아바타처럼 움직여야 했다.
▲당번병 대부분이 100m 기록 보유자(?)
1970~80년대 당번병들은 올림픽 육상경기에 나선다면 틀림없이 메달을 딸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만큼 동작이 재빠르다는 소리다.
당번병은 지휘관보다 먼저 가 현장을 살펴야 한다. 뒤늦게 떠났더라도 먼저 도착해 장성을 맞아야 한다. 만약 지휘관이 낙하훈련에 참여, 낙하산을 펴면 당번병은 뒤 따라 편 뒤 장군 바로 옆에 착지하는 고도의 실력도 보여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모 공수여단장을 모셨던 C씨는 "휴일 아침 여단장이 부대 내 골프연습장을 찾을 때면 번개처럼 달려가 주변 정리를 해 놓았다"고 숨가빴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어느 추운 날 연습을 마친 여단장이 샤워를 했는데, 찬물만 나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며 "샤워기를 미리 작동해 보지 않은 탓에 하늘이 노래졌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여단장은 당번병을 질책하진 않았으나, 연습장 관리 등을 맡고 있는 담당부서엔 누가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비상이 걸렸다.
사회에 나온 C씨는 부서 회식 때 누구보다 먼저 부장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부장보다 먼저 신발을 신고 나와 취해 비틀거리던 부장을 부축했는데,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일세"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때 C씨는 "군 시절에 비하면 땅짚고 헤엄친 격"이라며 싱긋 웃었다고 했다.
▲한때는 구두 미화 전담병사까지
당번병은 거의 만능이다. 청소와 요리, 세탁, 지휘관의 일정 관리 및 심기 살피기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마스터해야 한다.
장군의 구두관리도 그 중 하나이다. 한때 구두미화원이 비공식적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A씨는 흔히 '방위'로 불리는 단기사병 중 구두미화원 출신을 찾아 사령관실에 대기시켰다. 사회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사령관의 전투화와 정장화, 단화 등을 닦고 광냈음을 불문가지다.
A씨는 "이따금 참모들이 슬쩍 자신들의 구두도 내밀면 서비스를 해줬다"고 회상했다.
▲동·서양 섭렵한 호텔리어
군에서도 이런저런 연회가 열리게 마련이다. 격려를 위한 내부 행사, 외부인사 초청 등등을 위해서다. 이 역시 당번병(공관병)이 해야 할 임무 중 하나였다.
연회 성격에 따라 공관병들은 한식과 양식, 중식, 퓨전 음식을 준비하고 자리 세팅과 준비한 식·음료를 서비스한다. 이따금 양복을 입고 연회에 동원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사회에서 이런 업무에 익숙하거나 전공한 병사가 공관병으로 차출되기도 한다. 아예 경험이 없던 이들도 공관병으로 잔뼈가 굵은 뒤 전역하면 호텔 직원이 되기도 한다.
▲별들이 도열한 가운데 전역 때 공로상 받기도
A씨는 전역할 때 군을 빛낸 사병으로 공로상을 받았다.
참모(장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사령관실에서 상을 받고 장군들이 축하 박수를 쳐 준 기억을 지금도 A씨는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A씨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유명한 홍수환씨가 1974년 7월 육군 일병(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때 무개차에 올라 군 의장대 사열을 받았던 것보다 더한 영광을 누린 셈이다.
모 장군은 다른 부대로 옮길 때 당번병을 데리고 간 뒤 새 부대 참모들 앞에서 "내가 믿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며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그 후 당번병의 앞날은 더욱 활짝 폈다.
▲장군들끼리 '자식'(운전병 등) 자랑
당번병이나 운전병 등을 자식처럼 사랑한 지휘관도 있다. 그래서 장군끼리 '제 자식' 자랑을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회의 때 장군들은 은근히 '내 운전병이 잘 생겼지'라는 식으로 재미있는 기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큰 키와 흰 피부, 잘생긴 얼굴 등으로 '조인성 뺨쳤다'는 소리를 들었던 D씨는 입대 직후 장군 차 운전병으로 뽑혔다.
D씨는 "하루는 모셨던 장군이 '너 때문에 내가 기분이 좋아'라는 말을 했다"며 "알고 보니 다른 장군이 '그 운전병 훤칠하구먼'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 스트레스 등 그늘도
지금이야 덜하겠지만 당번병들은 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24시간 대기하면서 윗사람 심기를 살피는 일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장군의 지적사항 하나는 즉각 수정 보완해 올려야 하는 것이 군의 특성이다. 덤으로 따라붙는 건 질책, 경우에 따라 군기교육대가 기다린다.
어느 운전병은 "군 사령부 회의를 마치면 재빠리 차를 대기시켜야 한다"며 "다른 장군 차보다 늦으면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도 했다"며 힘들었던 때를 털어놓았다.
별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스트레스 지수는 높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요즘 당번병들은 '3D 업종'이라며 기피대상으로 불리고 있어 '당번병=꿀보직'은 신화 속 얘기가 되고 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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