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는 13일 일제가 용산 군용지를 조성하기 전 조사한 가옥과 묘지, 전답 등의 구체적인 숫자가 담겨 있는 문건 61쪽을 공개했다. 이 문건은 용산문화원에서 지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김천수(41)씨가 2014년 발견한 것이다. 김씨는 아시아역사 자료센터에서 수십만건의 문서를 조회한 끝에 일본 방위성이 공개한 일제시대 기밀문서 ‘밀대일기(密大日記)’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냈으며, 이후 수년간 상세히 분석했다.
문건은 군용지 수용을 둘러싸고 당시 한국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부’, 일본 육군성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담아내 이목을 끈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강압적인 용산군용지 수용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반발해 통감부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분쟁 발생이 우려된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주민들의 반발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군용지 수용을 요청한 1905년부터 1908년 강제이주가 완료될 때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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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가 13일 공개한 일제의 용산군용지 수용 관련 문건인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 111년 만에 공개된 문건은 1906년 일본군이 용산기지를 조성하기에 앞서 작성된 61쪽 분량으로, 일제가 용산 군용지를 수용하면서 조사한 가옥·묘지·전답 등의 구체적인 숫자가 담겨 있다. 연합뉴스 |
문건 말미에는 용산군용지의 면적과 경계선이 표시된 지도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韓國龍山軍用收容地明細圖)도 9쪽에 걸쳐 실려 있다. 명세도에는 동자동부터 이촌동까지 군대가 주둔하기 이전의 옛 용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용산은 원효로 일대의 용산방(龍山坊)과 이태원·서빙고동 일대인 둔지방(屯芝坊)으로 나뉘었는데, 명세도에는 둔지방의 일부인 ‘둔지미 한인마을’의 위치와 마을 규모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김씨는 “외국군의 주둔 역사로 점철된 용산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한이 담긴 장소라는 것이 이번에 드러난 것”이라고 밝혔다.
구는 후암동∼서빙고동 사이 옛길을 복원하는 등 향후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 이번에 드러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이번 발굴을 계기로 용산공원의 역사성과 공간적 특성에 대한 연구를 확대할 것”이라며 “용산의 역사성과 장소에 대한 고민이 용산공원 사업에 담기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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