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벙커와 벙키는 각각 정말 힘들게 해서 함께 근무하고 싶지 않은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를 가리키는 판사들 사이의 은어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중앙지법 한 재판부의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들이 갈등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법원 고충처리위원회가 접수했다. 고충처리위는 해당 부장판사 사무실과 나란히 붙어 있는 배석판사들 사무실을 다른 층으로 옮겼다. 이 재판부는 다음달 사무분담이 바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또 다른 재판부도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간 갈등으로 배석판사들이 단독판사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업무 외적으로도 △배석판사와 협의 없는 재판 일정 결정 △야근과 주말근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식 △폭언이나 부적절한 언행 △전임 배석이나 좌·우 배석 간 비교 등도 자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재경지법의 A배석판사는 “배석판사들이 야간·주말근무를 자주 하지 않는다며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배석판사들은 대등하게 이뤄져야 할 합의부 판결이 사실상 부장판사 중심으로 결정된다는 점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부장판사들도 배석들이 작성하는 판결문 초안의 질 등을 놓고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대법원 규칙 ‘법관 등의 사무분담 및 사건배당에 관한 예규’ 제2장 4조에 따르면 합의부의 경우 재판장에 대해 주심사건을 분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이 규정에 따라 합의부 사건별 판결문은 주심인 배석판사가 쓰고 부장판사가 최종 수정하는 게 관례다. 재경지법의 B부장판사는 “배석판사가 기록을 꼼꼼하게 보고 완결성이 높은 판결문 초안을 쓰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부장(판사)들 몫”이라고 말했다. 수정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배석판사들을 보면 속 터지기도 한다.
양측 갈등은 배석판사 기간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변호사업계 불황 등으로 ‘경력 법관’과 법복을 벗지 않는 고참판사가 늘면서 법원 내 인사적체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만큼 각 법원에서 배석판사로 근무해야 하는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수도권 소재 법원 C판사는 “전에는 길어야 5년가량 배석판사로 근무했다면 지금은 보통 7∼8년, 심지어 10년을 넘기기도 한다”며 “이런 추세라면 배석 기간이 더 늘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법원 내에서 1심을 전원 단독화하고 지방법원을 중심으로 항소심을 대등재판부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오는 23일 예정된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이 같은 문제가 논의될지 주목된다.
염유섭·배민영 기자 yuseob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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