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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권력 휘두른 한국 법조계의 뿌리 ‘불편한 진실’을 캐다

입력 : 2018-11-24 03:00:00 수정 : 2018-11-23 19: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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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서기들 시험 없이 법관 임용 특혜/‘미자격자’ 강박감에 공안검사 필두 서/ 일제 패망 선언 날 변시 응시 ‘이법회’/ 日人 시험관 겁박해 전원 합격증 강탈/
초기 법조 인사 3000명 출신·성향 분석
김두식 지음/창비/3만원
법률가들-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김두식 지음/창비/3만원


“대한민국 최초의 판·검사와 변호사, 그들을 알아야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이른바 한국 법조의 뿌리를 알아야 지금의 ‘사법농단’사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불가침의 성역 한국 판·검사와 변호사들의 세계를 폭로한 전작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유명해진 저자 김 교수가 또 걸작을 냈다. 해방 직후부터 활동한 초기 법조계 인사 3000여명의 뿌리와 성향을 분석해낸 책이다. 김 교수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까지 활동한 이들을 몇 부류로 구분했다.

1그룹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인사들로, 박정희정부까지 법조계를 주물렀다. 2그룹은 1922년부터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인사들이다. 3그룹은 일제강점기 서기 겸 통역관으로 일하다 판·검사에 임용된 이들이다. 4그룹은 해방된 다음 각종 시험에 합격해 법조계에 입문한 법률가들이다. 

김 교수는 그룹별로 대표적인 인물을 뽑아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그룹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영재와 민복기를 꼽는다. 독립운동가 집안인 김영재는 경성제대 졸업 후 서울과 평양에서 검사로 일했다. 해방 직후 그는 일제 부역행위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3년간 자숙했다가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복귀한 뒤 남로당에 가입했다. 애초 김영재는 좌익이 아니었다. 당시 친일 부역자들이 대부분 보수 기득권 그룹에 편승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김영재 같은 인사들은 거의 이런 이유로 조작된 말 ‘빨갱이’를 뒤집어썼다. 김영재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월북했다가 행방불명됐다. 친일 가문 출신인 민복기는 같은 경성제대 졸업 후 판사가 됐고, 해방 이후 법무부 검찰국장과 대통령 법률비서관을 지냈다. 한국전쟁 당시 성북동에 은신한 그는 박정희정부에서 법무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김 교수는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봤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사람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며 “누구도 이러한 역사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풀이했다.

‘법정’ 1950년 5월호에 실린 제2차 법조프락치 사건의 판결문이다. 법조내부에 이른바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검사들이 구속, 퇴출된 사건이다.
특히 김 교수는 3그룹 집단을 강조한다. 경력 7년을 넘긴 서기들은 시험 없이 판·검사에 임용되는 특혜를 누렸다. 이회창 전 총리의 부친 이홍규가 대표적이다.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15년간 서기 겸 통역관으로 일하다 1945년 12월 20일 순천지청 검사가 됐다. 이들 미자격자는 판사보다 검사들 중에 더 많았다고 한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들의 강박감은 해방공간의 무리한 ‘빨갱이 조작’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김 교수는 “1950년 3월 제2차 법조 프락치 사건은 좌익을 박멸해야 한다는 극우세력의 편집증적 집착과 권력 욕심이 만들어낸 ‘관제 빨갱이’의 대향연”이라고 비판한다. 당시 이홍규 검사는 ‘빨갱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초를 겪기도 했다.

4그룹은 법조계 최대 스캔들로 평가되는 ‘이법회’(以法會, 혹은 의법회) 출신들이다. 이법회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45년 8월 14일 조선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가 일제 감독관이 사라지자 응시자들 중 106명이 합격증을 받았다. 그 전말은 이렇다. 나흘간의 시험 이틀째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방송이 울리자 일본인 시험관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응시자들은 궁지에 몰린 일본인 시험위원들을 겁박해 합격증을 받아냈던 것. 응시사실만 있으면 모두 합격을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이법회’ 멤버들은 해방 후 각종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초창기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인력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법회 멤버들은 그 경력을 감추는 바람에 지금도 전체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직이다.

김두식 교수는 최근 발간한 ‘법률가들’을 통해 “최고 엘리트라는 법조인들이 지금과 같은 권력을 누릴 자격을 갖추었나, 그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인가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48년 이전 필기시험을 면제받은 사람은 대부분 이법회 출신”이라면서 “전두환 정권에서 대법원장에 오른 유태흥과 인권 변호사 홍남순이 이법회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해방 당일 시험에 응시했다는 기록만으로 특혜를 누렸고 이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오늘날 법률가들은 어려운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해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고 보지만, 실상은 그 뿌리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면서 “해방 정국에서는 시험에 붙지 않고도 법률가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전두환 대법원장’이었던 유태흥은 공식기록으로 2회 변호사시험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법회 출신이다. 그러나 홍남순의 경우 같은 경로를 거쳤다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김 교수는 “행정부와 입법부는 ‘선출된 권력’인 반면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어서 그 정당성이 늘 문제된다”면서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법조계 엘리트가 되려면 반성은 하지 말고 자기 이익만 취해야 한다고 느낄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교수는 사법농단에 대해 “법원과 검찰 사무실에 돈이 돌던 1990년대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다”면서 “향후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에 적힌 대로 법관 개개인이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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