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왔네.”
지난 5일 직장인 이모(31)씨는 한숨을 내쉬며 요란하게 울리는 긴급재난문자(재난문자) 알림을 껐다. 그는 “요즘 매일 ‘미세먼지 비상 저감조치 시행’ 재난문자가 오는데 정말 귀찮아 죽겠다. 미세먼지가 심한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며 “재난문자 내용도 고작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마스크를 챙기라’는 게 전부다. 현실적으로 출근을 안 할 수도 없는데 어떨 땐 문자가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고 답답해했다.
최악의 미세먼지 사태로 연일 이어지는 재난문자에 피로를 호소하는 시민이 많다. 실제 환경부는 사상 처음으로 수도권 전역에 지난달 28일부터 6일까지 7일 연속 미세먼지 경보 재난문자를 발송했다. 환경부뿐 아니라 지자체 등 여러 기관에서 보내기도 한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잦은 재난문자 발송이 시민들의 안전의식을 둔감하게 해 정작 홍수, 태풍 등 급박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다.
◆위급할 땐 안 오던 재난문자... 이젠 너무 자주 와 문제
2006년 도입된 긴급재난문자방송서비스(CBS)는 재난·재해 발생 예상지역 또는 재난발생지역 주변에 있는 국민에게 재난 정보를 휴대전화로 전달해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2013년 1월1일부터 출시된 4G 휴대폰은 재난문자 수신 기능이 의무적으로 탑재됐다.
지금은 재난문자가 너무 자주 와 논란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도 재난문자가 제 기능을 못 해 질타를 받던 때도 있었다.
2016년 7월 울산에선 규모 5.0의 지진이 발생한 지 18분이 지나서야 재난문자가 발송됐다. 심지어 발생일자도 5일이 아닌 4일로 표기해 혼란을 가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경북 경주에선 규모 5.1과 5.8의 강진이 발생했을 땐 8~9분 후에야 재난문자가 송출됐다. 2017년 5월 강원도에선 큰 화재가 발생해 최초 발화지점에서 직선거리로 3km 넘게 떨어진 마을까지 불이 번져 주택 7채가 불탔으나 주민 누구도 재난문자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지역 수준에서 긴급한 재난 발생 시 지방자치단체의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하자 2017년 8월 행정안전부(행안부)는 긴급재난문자 발송 권한을 지방자치단체에 일부 이양했다. 현재 재난문자를 송출하는 기관은 행안부, 지자체, 기상청, 재난대비기관 등이다.
◆지자체, 책임 피하려 ‘과발송’하는 경향도
이 때문에 행정 관료들이 ‘안전관리에 소홀했다’는 질책을 피하고자 재난문자를 ‘과발송’하는 경향이 생겼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 4일 행안부는 부산시가 지난 1월 송출한 긴급재난문자 12건 중 8건을 ‘부적절 송출 사례’로 규정해 통보했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일부 구간 교통 통제 등 단순 행정 내용과 긴급재난문자 송출 기준에 없는 미세먼지 주의보에도 긴급재난문자를 송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행안부 안전소통담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강원도 산불 때도 그랬고 지난 여름 폭염 재난문자를 안 보냈다가 문제 된 적이 있다 보니 ‘안 보내고 욕먹는 것보다 보내고 욕먹는 게 낫다’는 내부적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다만 잦은 재난문자로 시민들의 피로도가 높은 걸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알렸다.
◆미세먼지 경보 시 무조건 발송해야... 시민들 “미세먼지가 긴급?”
미세먼지 경보는 태풍, 호우, 홍수, 대설, 폭염 등과 함께 긴급재난문자 송출 기준에 들어간다. 따라서 현재 7일 연속 신기록을 이어가는 중인 미세먼지 관련 재난문자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지자체는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됐을 때 반드시 재난문자를 보내야 할까?
행안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경보가 발령되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며 “다만 미세먼지 경보 발령 자체가 지자체에서 하게 돼 있다. 재난문자를 언제 보낼지는 사실상 지자체의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시민은 일상이 된 미세먼지가 ‘긴급한’ 일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다. 직장인 윤모(32)씨는 최근 거래처와 중요한 통화 중 재난문자가 와 곤란을 겪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 회사 측 실수를 해명하는 와중에 미세먼지 재난문자 사이렌이 울려 상대방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아 진땀을 뺐다”며 “빠른 대피가 필요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재난문자를 보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운전 중 갑자기 울린 재난문자 때문에 당황한 사례도 있다. 50대 남성 박모씨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차를 몰고 가던 중에 재난문자가 오는 바람에 지도를 보기 어려워 곤란했다”고 밝혔다.
◆전문가 “잦은 재난문자가 오히려 안전불감증 키울 수도”
시민들이 너무 자주 재난문자를 받는 바람에 정작 급박한 상황에선 둔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통화에서 “최근 재난문자가 너무 자주 오다 보니 시민들로부터 마치 귀찮은 스팸문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곽 교수는 잦은 재난문자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는 “정부에서 보내는 재난문자에는 대처방안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났으니 어디로 피하라’ 등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줘야 하는데 단순히 ‘마스크 하라’ 이것뿐”이라며 “미세먼지가 많다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자주 재난문자를 받게 되면 현재 상황을 ‘재난’이라고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무력감을 느끼고 포기하게 된다고도 했다. 권 교수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노 등 피로감을 안 느끼기 위해 둔감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말 큰 재난이 왔을 때도 중요한 정보를 무시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재난문자를 지금처럼 흔하게 보내야 한다면 내용을 좀 더 다양화하길 주문했다. 권 교수는 “미세먼지는 지진, 홍수, 태풍 등의 재난과는 종류가 다른 것 같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그런데도 (미세먼지 재난문자 내용이) ‘외출을 자제하라’, ‘마스크를 써라’ 매번 똑같은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특수 상황에선 우울감보다 희망과 활력을 주는 내용을 담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지역별로 어제와 비교를 한다든지 ‘물을 뿌려라’, ‘실내 운동은 이렇게 해라’ 등 유익한 정보를 주면 사람들이 궁금해서라도 열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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